끝에 다다랐다
교사는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아야 한다.
연차가 차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고,
나는 이미
미룰 만큼
미뤄둔 상태였다.
더는
뒤로 미룰 수 없었다.
특수교사는
자신의 지역이 아니라
충남 아산에 있는
국립특수교육원에서
합숙하면서
그 연수를 받는다.
그래서
그해 여름,
나는 한 달을
아산에서 보내야 했다.
연수를 앞두고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한 달만,
아이들의
저녁 돌봄을 맡아달라고.
사업을 하는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안 된다고 말했다.
일을 조정할 수 없고,
아이들을
돌볼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차갑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그저
늘 하던 말과
같은 톤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친정인 전주에 맡겼고,
나는
아산으로 오갔다.
하루에 세 시간.
한 시간 반을 가고,
다시
한 시간 반을 돌아왔다.
아이들이
외갓집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전주에 있었고,
나는 아산에 있었고,
남편은 마산에 있었다.
우리는
같은 가족이었지만
같은 여름을
살고 있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남편이 쓰러졌다.
뇌수막염이었다.
입원이 필요했고,
충북 보은에 계시던
시부모님들이
마산으로 내려와
아들 곁을 지켰다.
아이들을 돌볼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은
부모님의 돌봄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들은 전주에,
나는 아산에,
남편은 병원에,
시부모님은
그 병실에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흩어져
각자의 자리를 메우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어긋나 있어서
그만
웃을 뻔했다.
이게
무슨 장면인가 싶었다.
웃을 수는 없었지만
웃음이 날 만큼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아주 분명해진 게 있었다.
내가 버티는 것으로
이 집의 시간은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의 하루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지금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연수가 끝나갈 즈음
나는
사직서를 떠올렸다.
결심이라기보다
이미 여러 방향에서
밀려온 끝에
더는 머물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교사를 관둔다는 건
내가 해온 일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기꺼이 내려놓는 일도 아니었다.
버텨온 방향이
아이들의 시간과
끝내 어긋나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나는
스스로 내려왔다기보다
여러 사정에 떠밀려
그 자리에서
밀려나듯
물러났다.
버티는 일을
그만둔 게 아니라,
더는
버틸 수 없는 자리에서
비켜선 것이었다.
그 과정을 지나며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직장을 다닌다는 건
개인의 의지나
각오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돌봄이
같은 방향에서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그 균형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남편이 나쁘거나
무책임해서가 아니었다.
그 역시
자기 자리에서
일을 감당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만
그 구조 안에서는
아이들의 시간과
내 일이
동시에 지켜질 수 없었다.
그래서
한쪽이
물러나야 했다.
그게
내 쪽이었다.
이건
모든 엄마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무던한 아이가 아니라
남다른 아이를 키우는 불안과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불확실함이
그 위에
겹쳐져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그만두지 않았더라면이 아니라,
그때
조금만 덜 밀렸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때의 나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 질문이
지금도
마음 한쪽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