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시작하는 용기

by B급선배

#1

나는 누구인가 발표하라는 과제를 받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나는 누구지? 무슨 발표를 어떻게 하라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전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비틀즈를 들었고 마침 Across the universe의 후렴구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가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배우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 <파이란>의 포스터와(다들 아시죠? 최민식이 장백지를 업고 있는) 김영하 작가의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네, 얄팍하게도 저는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받고 제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이 결국 제 자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존 레논의 삶을 좋아하고, 최민식 같은 배우가 되고 싶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김영하 같은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영화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에서 교수님은 지난주에 낸 과제에 대해 누가 먼저 발표할지를 물었고 난 손을 들어 답했다. 내 발표 후 교수님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리고 내게 혹시 담배를 태우냐고 물었다.


#2

아마 스물다섯 살 봄이었을 것이다. 난 그해 이미 학과 수업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고 비싼 등록금과 그에 비례하지 않을 듯한 나의 미래상 때문에 자퇴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관둘 때 관두더라도 애초에 대학교에 오고자 했던 목적인 ‘연기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떠올랐고 결국 학기를 등록하고야 말았다. 타과의 전공수업을 신청할 용기는 없었지만 교양수업은 어떻게든 소화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영화의 이해>와 <문학과 영화이야기>였다.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선포했다. 다음 시간까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발표하라고. 양식, 형태 모두 상관없지만 열외도 없다고. 그러고는 수업 종료를 선언한 뒤 돌아 나갔다. 10분이 채 안 되었을 것이다. 신선했다. 그리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이 일찍 끝나서 좋았던 것은 덤이다. 설렜다.


나는 누구냐는 질문을 계속 곱씹었다. 학교에서도,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나는 누구인지 설명하라고? 뭔 소린지. 생각의 진도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짜증도 났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떠올랐다. 생각하는 나는 곧 나다. 질문을 받고 고민하던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이 곧 나 아닐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낸 것 같았다.


#3

학교 흡연구역에서 교수님과 함께 나란히 섰다. 인상 깊게 잘 들었어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진지해서 감동했고,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말할 때 조심해야겠단 생각도 드네요. 말 조금 편하게 할게요. 학생 지금 몇 학년이지? 3학년입니다. 전공은? 경영학입니다. 경영학? 타과생이 이 수업을 왜 신청했지? 전 그저... 아까 발표했던 대로 이 수업에서 연기 같은 걸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숙했다.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복수전공이나 전과는 모든 학과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타과 이동이 제한되는 학과가 있었던 것이다. 연기전공이 그랬다. 뭐야 경영학과로는 잘만 넘어오던데 왜 연기전공은 안 되는 거야. 불평해도 어쩌겠는가 체계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 첫발은 내디뎠는데 역시 미래는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