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일과를 마치고 왠지 걷고 싶어 져서 숙소 밖으로 나갔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정동길을 지나서 크게 한 바퀴 돌고 오면 적당히 잠이 오겠구나, 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서대문 네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종로를 향하는 파란색 간선버스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오피스 빌딩의 불빛은 꺼져가고 길가의 카페들은
마감을 준비하고 있다. 공기는 차가워도 오랜만에 한가하게 걷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정동길 초입에서 잠시 고민했다. 광화문까지 다녀올까, 정동길로 돌아 나갈까. 광화문은 다음에 가기로 했다. 좁은 길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은 식당을 지나는데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장면이다. 웬 백발의 백인 할아버지가 식당에 혼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밥과 막걸리를 먹고 있었다. 그는 국밥을 한 숟갈, 그리고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켰다. 이질적인데 익숙하다. 어법에 안 맞을 표현이 마음에 맴돈다. 멀뚱히 쳐다보는 것은 실례이므로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묘한 끌어당김 때문에 대신 발걸음을 늦췄다. 근처 대사관 직원인가 보다, 어쩌면 사제일지도 모르겠네, 내가 유럽에서 카페테라스에 앉아 바게트에 커피를 마시면 저런 느낌일까, 어느덧 정동길 끝머리였다.
백인 할배와 막걸리. 그 장면에 오래 머물렀다. 무슨 사연일까 상상하다 곧 관뒀다.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정동길 끝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역시 광화문까지 걷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교회당을 지나칠 때에는 이영훈의 노랫말을 떠올렸다. 언젠가 다음에 정동길 그 작은 식당을 지나치는 날엔 난 오늘 만난 백인 노인을 떠올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