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풍악을 울려라

20Km 릴레이 3년째 해보며

by 경쾌늘보

경칩을 지나 춘분이 왔다.

땅이 녹으며 씨 뿌릴 준비를 하기 위해 밭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다.

씨도 준비하고, 밭도 갈아야 곧 씨를 뿌리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해야 한다.


이 달리기 농부, 경칩까지의 기간이 길었다.

언 땅이 천천히 녹나 싶어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기로 하고 기다려 보았다.

1월의 4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는 전혀 엄두가 나지 않았고,

2월의 건조함과 햄스트링 때문에 몸을 사리기도 하였다.

가끔의 달리기와 산책, 그리고 언덕 오르기로 아직도 달리기 몸은 준비가 안되었는지 상태만 확인할 뿐이었다.


그러다 3월이 오면 번뜩 드는 생각이 있다.

"릴레이 달리기가 있지!"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시작할 때 풍악을 울리는 것처럼,

3월의 릴레이는 나의 한 해 달리기 농사에 풍악을 울리며 본격 농사를 시작하자는 세리머니 같은 것이다.



매년 3월 둘째 주에 5Km를 4명의 주자가 달리는 20Km 이어달리기가 그것이다.

올 해도 똑같은 고민,

"이렇게 달리기를 안했는데 참가 할 수 있을까?"

그러다 역시나 신청 마감일에 등록을 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 3년 연속 이 대회에 아이들과 참가하게 되었다.

달리기 파트너가 없던 솔로 러너인지라 팀이 있어야 하는 이 레이스에 가족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함께 해주었다.


참가한 첫 해에는 느림보인 내가 인생 첫 하프 마라톤을 마친 후였다. 21Km를 했으니 5Km는 잘할 수 있음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당시 한 번도 5Km를 달려본 적 없었는데 기꺼이 응해주었고, 남편은 의향이 없기에 내가 두 번을 달리기로 하고 참가했다. 같은 주자가 연속해서 달릴 수 없는 규정이 있기에 한번 달리고 쉬고 다시 달리기로 했다. 하지만 나의 첫 5Km 후 높아진 심박 때문에 도저히 두 번째 5Km를 달릴 수 없었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하여 계획에 없던 아들이 두 번, 10Km를 달리고 완주를 하였다.


다음 해에는, 남편도 참가 의사가 있기에 4명의 주자로 참가했다. 가족 모두가 한 팀이 되어 릴레이를 한다는 것이 특별하기도 했기에, 그리고 나는 첫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 후였기에 왠지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경기 전 나는 선수들(가족들)에게 코치를 했다. 초반에 질주하지 말고 페이스 유지하며 가자고. 결국 그것은 나에게만 오면 됐을 하찮은 잔소리였다. 3명 모두 5Km를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고, 쥐가 나서 계속 멈추고 걸어야 했던 것은 나뿐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을 뻔하기 전에 선무당은 나가 떨어지고 사람들은 각자 잘해줬다. 역시 잘 모를 때의 어설픈 자신감이 가장 독이다.


저녁 6시에 시작하는 경기는 우리 팀의 3번째 주자가 이제 막 달릴 때쯤이면 빠른 팀의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을 들어온다. 이미 그들의 경기는 끝나고 한편에서 시상식이 시작된다. 그리고는 3월 늦여름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경기장의 공기와 빛깔이 어두워지고 그 어두움 속에 우리는 땀을 흘리며 계속 달린다.


시상식도 끝날 때쯤 우리의 경기는 끝났다. 땀으로 흠뻑 젖은 서로를 응원해 주고 힘들게 달리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함께 달려주고, 짧지 않은 5Km를 이어 나갔다. 똑같은 메달을 목에 하나씩 걸고 어두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것은 한층 두꺼운 추억을 만드는 것 같다.


이번 해에는, 남편이 참가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특별 주자가 참가했다. 지난 일 년 넘게 나와 주말에 함께 달려준 달벗이다. 4명의 주자 완성.


저녁에 행사장에 도착하니 올해는 뭔가 다른 점이 느껴졌다. 매년 분명 같았을 텐데 이제야 보인 것 같다. 매해 참가팀들이 늘고 있고, 이번 해에는 작년에 비해 100팀 이상이 늘었다. 모두 나와 같이 레크레이션 용 마음가짐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들에게 오히려 비장함이 느껴졌다. 러닝 클럽이나 크루들끼리의 경쟁이 있는 것이다. 질 수 없는 자존심, 꼭 이기고 싶은 승부욕들이 보였다.


그중 늘 느지막이 들어온 우리였기에, 승부욕 강한 아이는 올해는 우리도 밝을 때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보긴 하였으나 또 어두컴컴할 때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플랜 A로 하지는 못하여 미안했지만 그래도 나름 흡족했다. 3년 연속 같은 대회를 참가하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었기에.


좋아진 것은 아이들의 기록뿐이 아니라, 이제 5Km는 해볼 만하다는 아이들의 자신감과 더불어 작은 성과들이 주는 성장의 가능성이었다.

개인적으로는 KTX처럼 쌩하니 추월해가는 수많은 러너들로 수시로 마음이 쪼그라들기도 했지만, 나는 새마을호도 아닌 무궁화호 정도라 생각한다. 여전히 길을 내주고 멈추기를 자주 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달릴 수 있으니 달린다. 흥분감이나 긴장감에 나대는 마음도 조금은 차분해졌다. 그리고 한 팀이 되어 달리는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자라난다.


예전 같으면 무언가 새로운 시도나 시작을 엄두 내지 않았을 나이에, 차분한 성장이 피어나는 자신을 보는 것은 그 어떤 씨앗보다 기쁜 씨앗이다.


이제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올해는 부상 없이 단단한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11월, 올 해 농사 추수까지 때에 맞는 달리기 농사를 미루지 말아보자.

다음 풍악을 울릴때까지, 화이팅.




릴레이 시작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