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따기 좋은 날
장난감인가 싶을 정도로 빨갛고 반들거리며 손에 딱들어오는 크기의 호주 사과. 마트에 진열된 사과들을 처음 보면 정말 혹한다. 사과의 종류도 이토록 많단 말인가. 그래서 먹어보면 약간 신맛이 나거나 푸석거리기 일쑤이다. 그중 호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인기 있는 종은 빨갛고 예쁜 '핑크 레이디'이다. 이것이 나의 입맛에는 신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한때 덜 신맛이 나는 '갈라' 종류를 먹었지만 아삭임이 덜하고 푸석거린다. 너무 탐나는 빛깔의 '레드 딜리셔스' 혹은 청사과인 '골든 딜리셔스'나 '그래니 스미스'도 자주 손이 가지 않게 되는 맛이다.
사과를 껍질 까서 예쁘게 잘라 생으로 먹는 한국인에게 가장 낯설었던 것은 뜨거운 사과였다. 사과는 생으로 아삭아삭 씹어먹는 것이 사과를 먹는 방법이었던 우리의 문화.
그런데 사과를 오븐에 구워 뜨겁게 먹다니!
제대로 맛있는 사과라면 그렇게 잼으로 만들거나 시럽을 재워놓거나, 뜨겁게 구워 먹을 필요까지 있었을까. 사과들을 먹어보니 대부분 시큼하기에 열로 당도를 높여 빵과 함께 구워 애플파이 등을 해 먹었겠구나 하는 혼자만의 합리적 추측이다.
많은 품종의 호주 사과 중 나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역시 한국에서부터 먹었던 부사, '후지'이다. 익숙한 맛이 주는 선호일까. 이민 초기에는 후지가 드물기도 하였고 대세인 핑크 레이디를 먹어야 할 것 같았지만 요즘은 후지 사과가 있기에 다른 종류의 사과들과는 정중하게 작별인사 한지 오래되었다.
아니, 사실 후지 사과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사과 농장에서 갔을 때부터이다. 4월이면 각종 과실나무들의 열매 중 호불호가 가장 덜한 사과가 열린다. 사과 농장에 가서 갓 딴 사과, 그중 후지를 먹었을 때 과장을 보태자면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눈이 열렸을 때처럼 사과의 진정한 맛에 눈이 열렸더랬다. 너무 신선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즙으로 남았다. 지금까지 마트에서 사 먹었던 사과들은 유통과정에서 시간이 흐르기도 하고, 저장되었다 나오기도 하니 갓 딴 사과의 맛은 전혀 다른 레벨이었다.
그렇다고 매번 사과 농장까지 가서 늘 따는 노동을 할 수는 없으니, 그 뒤로는 종종 운전해서 40-50분 걸리는 사과 농장 마을에 가서 그 시즌에 딴 사과만 파는 사과가게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사과 시즌이 열렸다. 지난주 농부들이나 도매업자들이 직거래하는 선데이 마켓에 갔지만 후지 사과를 찾을 수 없었다. 딱 한 군데 팔기에 이번 시즌 것이냐고 물어봤는데 철석같이 그렇다고 했다. 믿고 샀지만 사기였다. 집에 와서 보니 저장고에 오래 있던 사과였다. 장사꾼에게 속았다.
요즘 마트에 아직 수확 후지 사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마침 부활절 연휴에다 아이들도 일정이 없어서 "사과 따러 가자!" 했다. 귀찮기도 하겠지만 군말 없이 엄마의 계절놀이-한때는 아이들의 것이었는데-를 따라나서줌에 고맙다.
우리의 목표는 후지이기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출발했다. 4시까지 여는 농장에 3시 반이 마지막 입장인데, 3시 27분에 들어갔다.
처음에 갔을 때 사과 농장 입장료는 5불이었는데 올해 8불로 올랐다. 1인당 적어도 8불 이상 먹어야 우리도 남는 장사인데 하는 단순 계산이 슬쩍 떠올랐다. 농장에서 각자가 딴 사과는 5Kg까지는 1킬로당 5불에, 5kg 이상은 1킬로당 4불에 살 수 있다. 갓 딴신선한 사과를 시중보다 조금 저렴하게 사는 가격은 그렇다 쳐도, 입장료 8불은 농장에서 1인당 2kg 정도의 사과를 먹으면 덜 아깝게 된다. 사과를 한 자리에서 2Kg까지 먹을 수 있는 수가? 시간이 길면 몰라도 무리이다. 우스운 계산으로 생각하고 입장료는 추억 만들기 입장료로 전환하기로 했다. 초가을 아이들과 높은 언덕 고랑마다 심긴 사과 밭에서 추억 만들기로.
FUJI라는 반가운 표지판을 따라갔다. 올 가을 처음 먹는 후지사과가 되겠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사과를 따고 양팔 무겁게 사과들 가득 들고 언덕을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한다. 아이를 안고 오는 사람도 있고, 사과 따는 복장과는 전혀 무관하게 인스타 사진만을 찍으러 온 젊은이들도 있었다.
후지 사과 고랑에 도착하였다. 앗 그런데, 아직 절정기가 아니었다. 이제 막 붉게 변하고 있는 사과들. 딸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사과들이 더 많았다. 그중 햇볕 받아 잘 자란 높은 쪽 사과들이 우리를 유혹했으나 손이 닿지 않자 아이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아들이 딸을 어깨에 태웠고 올라탄 딸이 팔을 뻗어 사과들을 땄다. 사과에 진심인 가족이다. 것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최대한 조심스레 사과들을 따 담았지만, 하나를 따려다 옆에 있는 사과들이 후드득 땅으로 떨어지는 비일비재하다. 한 입 먹고 버려진 사과들, 누군가 칼을 가져왔는지 껍질을 어마어마 까서 먹고 (한국인이 아니길) 껍질을 버려놓은 장면들, 고랑마다 넘쳐나는 떨어진 사과들을 뒤로하고 농장을 나왔다. 사과 따기 구역은 정해져 있으니 방문객들에게 주어진 나무들은 농장에서 상품화하는 사과들은 아닐 터이다. 게다가 입장료와 커피나 음식 등 기타 수입도 생기니 금전적으로 손해 볼 것 없겠지만, 장난으로 혹은 무심코 버려지는 수많은 사과들이 눈에 밟히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
자연에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자연식품들은 늘 고맙고 소중하다. 그중 사과는 인류를 건강하게 만드는데 어찌나 이바지 왔을까.
사과 농장에서 나오니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해가 느긋하게 내려갈 시간이다. 늦은 오후 햇살 아래의 애들레이드 힐 (Adelaide Hill)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풍광이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사과 따기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