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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Reader Aug 08. 2022

쓰지 못하는 노트

타인의 배려에 대한 단상

내가 아끼는 소중한 노트 이야길 하나 하려고 한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노트이다. 가지고 있은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까워서 글은커녕 줄 하나 못 긋고 모셔두고 있다.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며 제작한 한정판 사은 품 굳즈이다. 해외는 사은 품을 배송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누군가가 책을 사서 사은품을 받은 다음 내게 따로 보내지 않으면 구할 수도 없다. 이 노트를 보내준 그 누군가는 바로 그 출판사 대표이자, 에디터이시고 시인이다.  


사은품 노트의 주인공, 책 제목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다.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시집으로는 이례적인 50쇄 이상을 찍으며 (21년도 기록이니 지금을 훨씬 많을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박준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그의 시는 쉽게 읽히고 서정적이며 메마른 감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일깨워 달뜨게 한다. 도대체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시인의 뇌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어떤 시는 내가 평생을 끼고 사는 딱 내 맘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은품을 탐낼 만큼 열렬한 팬은 아닌데 표지를 보는 순간 홀딱 반했다. 책 표지가 아니고 공책 표지.


중간 톤의 블루색 바탕에 단발머리 여자 (소녀 같아 보이는) 뒷모습 그림이 가운데 있다. 머리부터 어깨 조금 밑까지 살짝 보이게 클로즈업한 그림이다. 그림의 전체적인 톤은 내추럴 브라운과 탠 계열이다. 목덜미 위까지 단발로 잘린 머리가 젤 진한 브라운 톤이고 머리를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이고 있어 살짝 드러난 왼쪽 턱 선부터 목덜미와 맨살인 어깨는 피부색 연한 탠 계열이고 그림의 백그라운드 역시 머리와 피부의 중간 정도 되는 회색빛이 많이 섞인 회갈색 칼라다.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뒷모습이 말을 거는 듯하여 자꾸 돌아보게 한다. 예전부터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고립감, 쓸쓸함 같은 것에 좀 매혹되긴 했다. 내추럴 브라운 톤이 노트 커버의 색 블루와 대조되어 눈에 더 확 띄고 눈길을 끈다. 이 그림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영국 화가 기드온 루빈 Gideon Rubin의 작품이다. 그림 제목도 심플하게 <Back>. 시인께서 이 화가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다. 


산문집 책의 표지 그림은 같은 작가의 다른 그림이다. 책 커버 색은 중간 톤의 밝지 않은 올리브 그린 색이고 앞쪽에 크게 보트 타는 한 커플이 있고 뒤쪽에 작게 다른 한 커플이 더 보이는 그림이다.  이 커플은 얼굴이 없다. 얼굴 형태만 있을 뿐 눈 코 입은 아예 지운 듯이 싹 없앴다. 다른 부분은 여성의 옷의 작은 체크무늬까지 그릴 정도로 사실적인 디테일이 있지만 얼굴만 없다. 여자가 노를 잡고 있고 남자는 잠시 쉬는 듯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커플과 소녀의 뒷모습에서 풍겨지는 묘한 분위기가 비슷한 듯도 하다. 


나는 이 그림보다 공책의 그림이 더 좋아서 꼭 갖고 싶었다. 그때는 사은 품은 해외 배송이 안 되는 걸 모를 때여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길 듣고 급하게 주문을 했다. ‘울어요, 우리’라고 손글씨로 쓰인 초판 작가 사인본과 책 속의 구절이 적혀있는 책갈피 대 여섯 개는 함께 왔는데 노트북이 안 왔다. 그냥 그랬다고, 안 오나 보다고 트윗에 올린걸 (좀 불쌍하게 보이려 애썼을 수도 있다) 시인께서 어떻게 보고 안되었는지 내게 디엠 하여 직접 보내줄 테니 주소를 달라고 했다. 내 생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그런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어 이래도 되나, 준다고 막 받아도 되나 싶었다. 일주일 후 도착한 박스에는 뒷모습 노트뿐만 아니라 산문집 책도 한 권, 그즈음 출간한 시인의 새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 들어 있었다. 두 권 다 내 이름과 작가 사인이 있고 손 글씨로 산문집에는 ‘나는 무엇이 적힌 줄도 모르면서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라는 글귀가 시집에는 ‘그럼에도 사랑하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바라는 대가 하나 없이 줄 수 있는 이런 마음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고마웠다. 그만큼 나는 냉정한 개인주의 세상에 익숙해 있었다. 인간을 신뢰하지 않은 채 메마른 삶을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차마 글자 한자 못쓰는 이 노트는 그냥 노트가 아니고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간  인연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다.



**굳이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분이 누구신지 브런치 독자님들은 금방 추측할 수 있을 텐데… 그 당시 보내주실 때 곤란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소셜미디어에서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셔서 조용히 있었으나 오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별일이 있으랴 판단하고 그때의 소중한 마음이 생각나 굳이 약속을 깨뜨리고 글을 적어 보았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내 심정을 알아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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