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디자이너가 인디자인 대신 엑셀을 켤 때

by Slowwalk

습관처럼 엑셀 아이콘을 더블 클릭합니다. 모니터 화면 가득 차가운 격자무늬와 숫자들이 일렁입니다.

잘못 클릭한 셀에서 튀어나온 복잡한 함수 수식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힙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화려하지 않아도, 가난해도, 활자 냄새 맡으며 '출판인'으로 살겠다 다짐했던 16년 전의 그 디자이너는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제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은 시선을 사로잡는 북 디자인 시안이 아닙니다.

'매장 방문 고객 연령층 분포'와 '온라인 프로모션 조회 수'가 적힌, 건조한 데이터 덩어리들입니다.

빈 보고서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저를 재촉합니다. 감성은 넣어두고 어서 데이터를 입력하라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밥값을 하라고 닦달하는 신호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저 책 만드는 일이 좋아서 시작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1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어설픈 마케터와 편집 디자이너 사이, 그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10년 차쯤 되면 번듯한 출판인이 되어 명함을 내밀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정체성을 잃은 경력직의 비애뿐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했을까요?


아니요, 저는 좀 지독하게 버텼습니다.

책을 만들고 싶어서 신앙심도 없이 종교 단체에 '위장 취업'을 감행했고,

일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한 회사에 네 번이나 재입사하는 미련함도 보였습니다.

통장의 잔액이 늘기는커녕 퇴직금은 이직하는 동안 생활비로 써버린지 오래입니다.


지금 모니터 속 엑셀 시트에 비친 제 얼굴은 지쳐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다음'을 꿈꿉니다.


이 글은 화려한 성공담이 아닙니다.

책 냄새를 좇아 이곳저곳을 떠돌며 쌓아온, 어느 16년 차 직장인의 질긴 '생존 기록'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저의 이 짠내 나는 분투기가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