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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어시인 Dec 18. 2021

슬기로운 슬럼프

슬기로운 수어 생활이 하고 싶어서

 수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이 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만남에 제약이 있어서 농인과의 만남도 줄어들고 수어로 대화할 시간도 점점 사라져 갔다. 언어란 모름지기 자주 써먹어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인데, 아주 기초적인 단어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의 소중한 시간과 힘을 들여 애써 쌓아 놓은 수어 실력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다니 우울한 감정이 올라오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수어를 배우러 가지도 못하니 아는 농인과 함께 영상 통화할 때만 유일하게 수어를 쓸 수 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상대방의 시간을 계속 붙잡기도 미안하고, 나도 수어를 쓰긴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상황에 답답함만 늘어갔다. 내 안에 있었던 수어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사라지면서 일상생활 속 느끼는 긍정적 감정도 점점 메말라갔다.      


 혼자서 수어를 습득하는 방식으로는 너무나 큰 한계가 많았다. 특히, 실제 생활에서 쓰이는 수어를 배우고 싶은데, 인터넷에 있는 영상 자료는 나의 배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켰다. 사람마다 수어를 쓰는 방식이 달랐고, 수지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수어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수어 문법에 안 맞는 영상을 올려대니 이를 걸러내고 제대로 된 수어 영상만 골라볼 줄 알아야 하는데 아직 그런 능력이 내겐 없었다.


 나는 수어로도 구어로도 원활하게 소통이 잘되지 않는 현재 상황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구어로 말하는 상대방의 입모양이 마스크로 가려져 안 보이니 구어로도 소통이 안되고, 수어 실력이 부족하니 나의 의견을 100%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건 어쩌면 상황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원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마음으로 쿨하게 여유로운 태도를 가지면 될 텐데 무엇이 그리 급하고 불안한 것일까?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답답하게 느낀 것이었다.

  '내가 이만큼 노력을 했으니 실력이 쑥쑥 늘어났겠지?'라는 기대만큼 수어 실력 발전 및 유지가 잘 되지 않아 거기로부터 오는 좌절감이 컸던 것이다.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병행하던 수어 수업이 결국 전부 온라인 형태로 대체되었다. 그것이 내겐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수업을 신청했다. 그때가 아마 2021년 5월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온라인으로 계속 수어를 배우고 있다.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내게 온라인 수업은 가뭄 속의 단비처럼 꼭 필요하고 절실했다. 물론 직접 가서 배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맞는 말이지만, 현실이 이렇다 보니 온라인으로라도 수어를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강사 유형이 크게 농인과 청인으로 나뉘는데, 나는 농인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비수지 요소를 자세히 배우고 싶어서 농인 강사로 선택했다.

 청인 강사도 물론 교육 방식이 훌륭하지만, 음성으로 강의를 진행하게 되면 나는 그 시간 내내 강사의 입모양을 봐야 하고 음량 및 발음에 대해 신경 는 압박감 및 스트레스를 겪어야 한다. 내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계속 긴장하면서 들어야 하기에 청인들과는 달리 나는 말소리를 듣는 것에 들이는 에너지는 상대적으로 훨씬 크고 버겁다. 청인들에게 비유를 하자면, 하루 종일 외국어 듣기 평가를 한 문제도 틀리지 않고 100점 맞아야 하는 압박감과 비슷할 것 같다.  그것도 365일 내내 견뎌야 한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그런 긴장감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버티고 사회생활을 몇십 년 해야 한다면? 나는 그런 방식으로 30년 넘게 그렇게 살아왔지만, 여전히 내게 구어(음성 언어)는 버거운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언어를 배울 때는 원어민에게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강사도 나와 같은 농인이라는 동질감과 소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편안함이 가장 큰 선택 이유였다. 내가 좋아하는 수어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보청기가 필요 없는 유일한 시간으로 자유로움을 누리며 오디즘(Audism)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어!’     


 내가 잊고 있었던 수어 단어 및 문장이 하나씩 떠오르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단어와 비수지 요소도 많이 배웠다. 덕분에 목말랐던 학습 욕구가 충족되고 내가 어느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많은 겸손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고급반을 수료하고 수어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할지라도 사람마다 언어를 다루는 범위가 다양하다. 또한, 수업마다 함께 듣는 수강생의 질문 내용도 달라서 강사가 설명해주는 내용도 달라지고, 강사마다 살아온 삶이 각자 다르기에 사용하는 예시가 다 다르다. 그래서 수업을 가능하면 다양하게 배우고, 꾸준히 반복 연습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언젠가 예전에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대한민국 정부 기관 최초 통역사가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 부분이 내게 큰 깨달음과 반성을 주었다. 그 통역사는 걸프전부터 통역을 시작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내한 시 동시통역도 담당하였다. 현재 교수로 재임하면서 통역사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데 선배로서 영어 실력 유지하는 팁을 말해준 내용이 있었다.       


“820페이지인 통·번역용 사전의 단어를 외우라고 해요.”

“처음에는 어려워 보여도 반복하다 보면 암기가 가능해요.”

“외우는 방법은 따로 없고 무조건 반복하는 것밖에 없어요.”

“아침에 영자 신문으로 기사를 보고 영어 뉴스도 들어요.”

“한글을 입력하면 영어로 번역하고 읽어주는 기능을 활용해요. 그것을 녹음해서 들고 다니면서 지금도 외워요.”     

                                                                                                     

 우와, 걸프전이 1991년도인데, 그로부터 30년 동안 매일 통역을 해 오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매일 같이 듣고, 외우고, 말하기를 반복한다니 고작 3년 동안 맛보기 정도만 공부해놓고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투덜댄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통역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어도 저렇게 노력하는데, 나는 매일 저렇게까지 보고, 쓰고 표현하여 반복 학습을 제대로나 했는지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수어도 영어처럼 매일 반복해서 외우고 나의 온몸으로 직접 수어로 자꾸 표현을 해봐야 실력이 향상되고 그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은 슬럼프가 아니라 내가 태만했던 것이었다. 3년 동안 매일 수어 영상 보고, 외우고, 반복하는 것을 혼자서라도 몇 시간씩 꾸준히 했더라면 이 핑계 저 핑계 댈 것도 없이 실력이 조금씩 향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어 단어 및 문장 하나라도 올바르게 제대로 외우고, 관용 어휘,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비수지 요소를 정확히 파악하여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만이 수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방법이었다. 현재 나와 있는 수어 사전은 예전에 제작한 것으로서 수어 문법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실제 수어와 안 맞는 부분이 많이 있다. 현재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해서 기대가 된다. 수어 사전에 나오는 용례 영상에는 비수지도 포함되어 있고 실제 농인이 수어하는 모습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라 용례를 참고하고 있다.(하지만, 수시로 감수가 필요한 부분이고, 100% 다 들어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기에 오류에 대한 부분은 감수해야 한다.)

 위에 나온 영어 통역 공부 방법이 현재 한국수어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수어 문법 연구가 최근에서야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충분한 검증 및 수어뭉치 자료가 더 필요해서 수어 공부 방법에 완전히 100%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언어를 공부하는 태도와 들여야 하는 노력, 시간에 대해서는 영어나 수어나 동일하다. 내가 배웠던 수어 표현을 어떤 예시 및 상황에 적용 가능한지 매일 고민하고 연구하고 농인 수어 강사에게 수시로 질문하여 내가 하는 수어가 맞는 방법인지 검증을 받으면서 차곡차곡 수어를 습득해가면서 나만의 수어 공부 방법을 터득해가야 할 것이다.


역시, 언어란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어도 하나의 언어였기에,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의 문화를 체득하고 시각 언어의 특성을 파악하여 매일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게 한 후에야 나도 원어민처럼 진짜 농인답게 수어를 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어에도 명백히 문법이 존재하고 더 많은 문법 연구가 필요함을 깨달았기에 더더욱 수어 문법 공부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을 위해, 소통을 위해 언어는 필수적인 존재이다. 나의 두 번째 언어이자 새로운 정체성을 일깨워 준 수어를 체득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달려가야겠다. 한국수어 문법론을 반복해서 정독하고, 수어 용례를 참고하고 실제로 수어를 어떻게 쓰는지 열심히 영상통화를 걸어 대화하면서 교정받고 내가 하는 수어가 맞는지 수시로 관찰하면서 실력을 키워가야겠다. 내가 했던 수어조차도 잊어버리는 경험이 있었기에 수어를 배우면서 내가 수어하는 모습을 셀프 촬영하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반복 학습이 가능하고 나도 모르게 틀린 자세로 하는 수어가 있는지 확인도 되니 자가 교정 및 타인 교정도 가능하다. 아직도 수어가 영 어설프고 버벅대는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그래, 그래~ 아주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쭉 해 나가자 ^0^"


 그렇게 매일 꾸준히 진득하게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슬럼프도 잊고 슬기로운 수어 생활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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