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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문 Sep 16. 2021

국영수 보다 결혼

결혼은 누가 가르쳐주나요

방과 방 사이에는 시간이 고이 묻어난 마루가 있었다. 거실 마루 벽 중앙에 단아하게 서있는 빨간색 장식장은 은색 자개 장식이 반짝거렸다. 장식장 아래 양쪽으로 열리는 문을 열면 구김 없는 반듯한 상자에 담긴 꽃 향기 나는 비누와 보들거리는 수건 등이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대 여섯 살의 어린 나는 그것들을 수시로 열어 소중하게 다루며 보물 놀이를 했다. 특별한 날 들어오는 선물상자에는 비누, 샴푸, 치약 같은 생필품들이 들어있었다. 아끼고 아끼는 엄마는 저 물건들을 사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 몰래 우리 집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냄비, 숟가락 세트 등을 꺼내다가 나만 아는 장소에 옮겨다 놓았다.

엄마는 아껴둔 새 물건들이 사라지면 내가 한 짓인 줄 알고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집갈 때 꼭 나에게 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때는 진심으로 그것들을 꼭 모았다가 시집갈 때 가져가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단아한 웨딩드레스도 이미 쟁여두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꼭 그 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내 행동들이 웃겼다며 몇 번이고 지난 일들을 얘기를 하셨다. 엄마의 드레스와 살림살이 몇 가지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결혼을 꿈꿨다. 하지만, 시집갈 때 가져갈 물건을 챙기는 것도 그때 시절뿐이었다.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쯤 새로 이사 간 집에는 마루도 빨간색 장식장도 없었다. 전에 살던 집이 훨씬 좋았는데 왜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인지 영문은 몰랐으나 물어볼 수도 없는 분위기는 눈치로 알았다. 방과 붙은 좁은 부엌에서 살림을 사는 엄마의 모습이 매우 고단해 보였고 때때로 한숨이 담겨 있는 것을 알았다. 언니와 나 남동생 다섯 가족이 작은 방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다. 그때는 작은 몸집이라 우리가 뒹굴며 살았던 우리 집이 작은지도 몰랐는데 초등학생이 되고 친구 집에 놀러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우리 집이 가족 숫자에 비해 매우 작다는 것을 알았다. 친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가 보니 친구의 언니와 친구는 각자 방이 있고 침대도 있고 주방도 거실도 따로였다. 그때부터 난 우리 집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혼자 품었다. 집에 돌아오니 친구의 집에 비해 좁고 어둡게 느껴지고 그날따라 지쳐 보이는 아빠, 엄마의 모습까지 나에게는 우리 집이 정규방송이 다 끝난 후의 소음 깔린 흑백 티브이 화면 같았다.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때때로 한숨 끝에 눈꼬리를 내리며 말씀하셨다. 우리 딸들이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 잘 갔으면 좋겠다고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시집 잘 가는 것이 네가 도착해야 할 인생의 종착역이야 라고 들리는 것 같았다.



10대를 지날 때는 각각의 이유로 시집을 안 가겠다고 선언하는 딸들이 꽤 있다. 내가 그런 딸이었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남녀가 아이를 낳고 사는 모습이 장밋빛만 보였다면 인생의 종착역이 결혼이어도 괜찮겠지만 당장에 내 부모의 모습만 보아도 괴로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삶을 자식으로 지켜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빠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부터 여러 차례 병원을 오갔고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병이 들어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아픈 사람보다 곁을 지키는 사람이 더 힘들다고 하는데 엄마의 주름은 그때 부쩍 늘어난 것 같다. 40 초반의 엄마는 꽤 밝았던 얼굴이었다. 가끔 농담스러운 말도 건네고 감정표현이 확실하지만 또 뒤끝은 없었던 엄마가 40 중반을 지나면서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고 아빠 대신 생계를 책임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엄마의 웃는 얼굴도 농담스러운 말들도 엄마가 일터로 나가는 시간만큼 줄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10대 시절의 기억이 차곡히 쌓여갔다. 하루하루 겨우 버티듯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나만이라도 얼른 빠져나가고 싶었다. 방 두 개 짜리 집에서 같은 방을 사용하던 언니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우리 둘은 얼른 어른이 되어서 둘만 나가서 사는 것을 꿈꿨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종착역은 결혼이 아닌 우리 둘만의 독립이었다. 어서 성인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나보다 먼저 성인이 된 언니는 서둘러 다른 역으로 향했다. 언니의 탈출구는 결혼이었고 나는 언니의 뒤를 이어 독립을 했다. 난 언니보다 꽤 오랜 시간을 혼자 잘 버티다가 내 발로 같은 역에 들어섰고 10년을 채우지 않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사물과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함께 있는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거미를 보고 무섭다고 말하면 거미에 대한 데이터가 없는 아이는 거미는 무서운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영유아일 때는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10대가 되면서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시기가 된다. 엄마는 힘들게 살아도 너희는 시집가서 잘 살아라 하는 말이 그대로 입력이 안 되고 엄마는 힘들다면서 왜 나한테 하라는 거야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라고 했던 엄마의 마음은 너희가 보는 것만큼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야 였을까? 결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꼬맹이 시절처럼 집에 있는 좋은 물건들을 들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시집을 잘 가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인생의 종착역도 탈출구도 아니어야 할 거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디에서도 진지하게 배우지 못했다. 딱히 부럽지도 않은 결혼생활을 보여주면서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면 해보는 게 낫다는 먼저 해본 사람들의 조언은 소리만 요란한 뻥튀기 같다. 배우자로 적합한지 구분하는 법, 시댁이라는 함정, 출산과 육아의 블랙홀, 결혼하고도 나를 잃지 않거나 찾는 법, 결혼생활의 적정기간 설정하기, 자신 있게 이혼하는 방법 등을 나만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엄마가 여자로 살아온 모습은 같은 여자로 안아주고 싶은 사건일 뿐 닮고 싶지는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엄마의 시대는 달랐고 나는 몰랐던 결혼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입대도 아닌데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결혼이라는 과목은 왜 없는 걸까? 국영수 어지간히 떼고 나면 그다음엔 진짜베기 공부를 누군가 집도해야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이벤트인 결혼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이혼은 그지같이 힘들었다.

#이혼#싱글맘#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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