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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인생 이야기

by 민들레


흐르는 강물처럼

이 말은 자동적으로 낭만적 감상이 떠오게 한다. 잔잔한 외로움, 어떤 초연함, 쓸쓸하지 않은 고독, 고즈넉한 행복, 아련함, 혹은 삶의 격정이 지나간 후의 조금은 감미로운 고요 등등 여러 함축적 의미들이 담겨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사람마다 같진 않겠지만 나처럼 비슷한 감상을 가진 사람이 꽤 있는 것 같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이름을 딴 카페나 음식점들을 지금도 더러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름의 카페를 만나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진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문구에 부합하며 함축된 의미를 잘 표현한 영화가 있다. 제목이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이다.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였던 노먼 멕 클레인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로버트 레드포드가 1992년에 제작한 영화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따뜻함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명작의 반열에 올라 아직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터이다. 이 영화는 인생에 대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나는 그 가운데서 일부분의 요소만을 추려 적어보려고 한다. 당연히 영화평이나 분석과는 거리가 멀며 그럴 만큼 내가 영화에 대한 지식이 있지도 않다.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이 영화 제목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데에 끌려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말해두겠다.


Screenshot_20201229-132318[1].jpg 사진출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에서


영화 주인공인 노먼 맥클레인(크레이그 셰퍼)과 폴 맥클레인 (브래드 피트) 두 형제는 부모와 함께 미국 몬태나주 블랙 폴 강가에 살고 있다. 화자이며 내레이션인 첫째 아들 늙은 노먼 맥클레인이 자신의 가족사를 회상하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첫 화면에 나타나는 찰랑이는 맑은 강물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높여준다. 이어서 지난날의 흑백사진들이 아련한 향수와 함께, 삶이 품은 애환의 흔적을 엿보이며 화면을 채우다가 지나간다. 이쯤 해서 노먼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동생과 즐기던 강가에서의 추억을 건져 올린다. 아버지는 작고 납작한 돌조각 한 개를 집어 들고서 “5억 년 전이야.”라고 두 소년에게 말해준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낚시를 가르쳤다. 형제가 아버지와 함께 강가에서 낚시하는 장면 한 컷 한 컷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낚싯줄을 던질 때, 휙휙 소리와 함께 세련된 포물선을 허공에 그리며 떨어지는 명주실처럼 가늘어 보이는 플라잉 낚싯줄, 꿈틀대는 강물과 물방울들, 수면에 튕겨지는 반짝이는 햇살, 커다란 팔로 세 부자를 안아주는 푸른 숲, 부푼 기대로 낚싯줄을 감아올리는 그들의 힘찬 팔 근육. 노먼은 회상한다.


“은혜는 예술을 통해 오고 예술은 쉽게 오지 않는다.”


은혜란 살아가면서 오는 행운이 아닐까. 노먼은 자신의 가족에게 행운이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 가족에겐 행복한 일이 많았어. 혹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삶의 지난함이 녹아있지 않은 인생은 없을 테니 말이다.


낚시는 노먼 가족에게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또한 낚시는 이들 가족의 사랑의 매개, 애정의 확인과 연결고리이며 가족을 결속시키는 힘이었다. 낚시를 할 때만은 이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무거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도 이들 형제는 “낚시 가자.”고 제안했고 의견 일치했다. 이들은 낚시를 하며 자연의 정결함과 맑은 순수함으로 돌아갔다. 동생인 폴은 물고기를 낚기 위해 거친 물살에 미끄러지고 휩쓸리며 온 힘을 다한다. 곧 월척을 잡아 올리고서 기쁘고 당당한 모습으로 스크린 화면을 가득 채운다. “난 완벽함을 목격했다. 동생은 모든 법칙을 벗어난 예술작품 같았다.”라고 노먼은 감탄했다.


Screenshot_20201229-132240[1].jpg 사진출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에서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위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이들 3 부자는 따뜻하고 감미로운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삶이 이처럼 평온한 순간의 연속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이때를 노먼은 다시 이렇게 표현한다.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


그렇다. 하지만 인생 없는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인생이란 예술이 쉽게 닿기 어려운 날것의 치열함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이들 가족처럼 서로에게 친밀함과 소통의 도구가 되어줄 ‘낚시’가 모든 가족에게 존재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우리 가족을 결속시키는 ‘낚시’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본다.


낚시터 강가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는 아버지 곁으로 노먼이 다가가 앉는다. 아들과 함께 앉아있던 아버지는 시선은 앞쪽을 향한 채 문득 왼팔을 옆으로 벌려 아들을 만진다. 아니 만지려고 한다. 아들이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손에 닿을 줄 알았던 아들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다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일부러 팔을 더 길게 뻗어 아들의 무릎을 한 번 쓰다듬는다. 하지만 민망한 듯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바로 손에 닿는 옆의 돌을 공연히 만지작댄다.


아들 노먼은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표정이다. 이와 같은 디테일한 묘사에 감독의 어떤 의도가 깔려있는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내가 느낀 점은 이미 부모의 품 안을 벗어난 자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씬이다. 관점에 따라 소통, 마음의 거리감 등으로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어쨌거나 매우 인상적이었던 장면 가운 데 하나였다.


형인 노먼은 별다른 문제없이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교수 자리도 얻는다. 그는 보통 부모들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아들이었다. 반면 동생 폴은 어릴 때부터 고집이 강했고 자유분방하며 반항아적 기질을 보였다. 지역신문 기자였지만 포커에 빠졌으며 거친 생활로 가족을 불안하게 했고 끝내는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어서 영화는 그의 부모가 식탁에 앉아 묵묵히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 또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부모로서 자식의 죽음보다 더 심장을 에이는 일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고 있는 부모는 살아있는 몸뚱이를 버리지 못해, 식욕 없는 입안으로 저주 같은 음식을 밀어 넣는다. 정말이지 인생은 아이러니다.


어느 날 폴과 형 노먼, 노먼의 여자 친구 오빠인 망나니 닐과 셋이서 낚시를 갔는데 닐이 사라지고 안 보였다. 그때 폴은 형에게 닐이 어디 갔느냐고 물으며 혼잣말을 한다. “누군가 도와주길 바랄 거야.” 이 말은 닐이 아닌 바로 폴 자신을 위한 독백이었으리라. 그 한 마디를 흘리고서 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의 얼굴은 미소로 빛난다. 태양빛 아래 화사한 그는 맑고 깨끗하며 아름답기만 하다. 이토록 빛나는 표정을 지닌 청년의 내면에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불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폴 자신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노먼이 폴의 도박을 말리기는 했다. 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좀 더 말렸어야 한다. 도박장 입구에서 폴을 두고 차를 돌리지 말았어야 했다. 포커를 하려고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폴은 이 일은 자기가 원하는 바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폴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몰랐고 형인 노먼은 더 몰랐다. 피를 나눈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서로의 마음 깊이에까지 닿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들 삶이 쓸쓸한 한 이유이기도 하다.


Screenshot_20201229-132410[1].jpg 사진출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에서


역시 막내아들에 대해 아는 점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다음에야 이렇게 회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름다운 아이였어.” 아버지가 생각한 폴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회적 질서에 무심하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열정을 쏟으며 젊은이의 특권을 마음껏 향유했던 점도 포함되는 것일까? 방황하는 청춘은 순수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위선과 작위를 팽개쳤을 때 아름다울 수 있다는 뜻일지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폴의 아름다움은 곳곳에서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폴은 아름답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인생은 예술작품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말과 같다. 인생은 모순투성이이므로, 한 개인에 대한 단정적 평가는 위험한 일이다. 목사인 아버지는 교회의 마지막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심중을 밝힌다.


“......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아름답지 않더라도 노여워 말자. 추함과 아름다움, 선과 악의 규정이란 대부분 오류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들 가족의 사랑과 추억이 깃든 블랙폴 강가에서 늙은 노먼은 여전히 낚싯대에 찌를 끼우며 마지막 내레이션을 이어간다.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그들은 내 마음속에 있다. 어둑해진 계곡에 홀로 있으면 모든 존재가 희미해져 나의 영혼과 기억에 합치된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된다. 흐르는 강물처럼”


노먼의 이 마지막 독백이 영화 전체 내용과 제목의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영화 내용을 띄엄띄엄 기술하다 보니 글이 산만해진 것 같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의미가 가볍지 않으며, 거기에 삶의 다양한 경험들이 녹아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노먼 가족은 모든 가족을 상징한다. 모든 가족은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지닌 애환의 경험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들의 역사는 노먼 맥클레인 가족과 다르지 않게 난해한 모순을 품고서 자연의 흐름과 함께 지속될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노먼의 아버지가 돌조각을 보며 “5억 년 전이야.”라고 말했듯이 어쩌면 앞으로 5억 년 이후까지도 말이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감상적 언어의 옷을 입으면 조금은 부드럽고 편안해진다. 왠지 무거움을 멀리 던져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 이러한 것은 나의 사유이며 나의 느낌이다. 누구든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멋진 문구를 만난다면 무겁지 않고 가벼운 그러나 가볍지 않은, 이제는 친근하고 농익은 그 의미를 조용히 음미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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