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남는 것

브루탈리스트

by 작고따뜻한일상

작년 이맘때였다. 봄에 열릴 행사 운영 회의에서 발주기관 실무자가 말했다. "저희보다 전문가시니, 제안 대로 알아서 해주십시오."


진심이세요? 묻고 싶었지만, "네, 말씀하신 내용을 반영해서 일정에 맞춰 진행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고민했다. 제안서의 시안을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키맨인 국장의 취향을 따를 것인가. 결국 밤샘을 거듭하며 수정된 결과물은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국장 스타일로 완성되었다. 사내에서는 트렌드에 뒤처진 행사 아이덴티티라는 혹평이 오갔다. 이번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제안 과정이 내게 남았다는 사실로 위안 삼았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THE BRUTALIST

브루탈리스트의 3시간은 짧았다. 어깨에 힘을 준 채 숨 죽여 몰입했다. 영화의 '키비주얼'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은 극의 끝자락에 미완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압도적이었다. 클라이언트의 압박과 불운 속에서도 건축가가 지켜내려 고군분투했던 그것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천재성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구나' 하는 탄식과 함께, 오래도록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저토록 아프게 태어나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질문과 상념이 뒤엉켜 숨이 가빠왔다.


화면 속 바우하우스 양식의 의자를 본 순간 반가움이 앞섰다. 45도 각도의 구조물로 빛을 활용한 설계, 장식을 배제한 기능 중심의 미니멀리즘. 영화 내내 펼쳐지는 바우하우스적 디테일은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던 나의 미적 허영심과 갈증을 달래주었다.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건축가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화려했던 이력을 뒤로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며 자신의 이념을 실현할 기회를 잡는다. 덕분에 수용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걷지 못하게 된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도 미국으로 불러올 수 있게 된다.


비용 문제로 건축물의 높이를 낮춰야 했을 때, 토스는 설계비를 줄여 높이를 유지한다. 에르제벳은 자신의 급여로 생활하면 되니 건축의 본질을 지키라고 남편을 지지한다. 그녀는 토스를 붙잡아 주는 닻이었다. 극 후반부, 그녀의 폭로는 답답했던 가슴을 뚫어주었고 토스의 역작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십자가는 압권이었다.

토스가 갇혔던 수용소를 모티브로 한_ Van Buren Institute

생활은 위대하고 월급은 중하다. 내 월급으로 아이들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퍼즐을 맞추며 여가를 보내는 안온함.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상을 실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시간들. 그것은 만족이었을까, 자기 합리화였을까.


에필로그에서 조피아는 삼촌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전한다.

"Don't let anyone fool you, Zsófia.

No matter what the others try and sell you, it is the destination, not the journey."

속지 마라 조피아, 다른 이들이 뭐라 하든 중요한 건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란다.


홀로코스트, 약물중독, 정신과 육체의 착취... 만신창이가 된 채 끝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해 낸 토스의 모습에 나를 비췄다. 해마다 키아프(KIAF)와 유명 전시회를 기웃거리는 나를 본다. 애써 덮어두었지만 여전히 남은 미련과 아쉬움들.


천재성이란, 혹은 오래도록 살아남는 아름다움이란 잔혹한(brutal)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기어이 그 '목적지'에 닿으려는 처절한 고집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일까. 여정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온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 실패와 좌절의 윤곽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정을 택했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토스가 도달한 목적지는 하나였다. 그의 건축은 하나의 형상으로 구현되어야 했고, 그를 갈아 넣어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모든 삶이 그와 같은 단일한 목적지를 요구받지는 않는다. 모든 재능이 하나의 기념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문제는 목적의 유무가 아니라, 목적이 단 하나뿐이라고 믿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토스의 목적이 건축이라는 단일한 기념비였다면, 나의 목적은 삶 곳곳에 존재한다. 세 아이들의 평온한 유년을 지켜내는 것. 역작을 남기지는 못해도 아이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전해주는 것. 그리하여 오래도록 남지 않아도, 찰나에 빛나는 것들 또한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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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을 맞이하며

영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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