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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고따뜻한일상 Jan 22. 2024

눈 오는 날,  퇴근길 두 시간

오, 윌리엄!

정수기 위에 아이폰을 놓고 반디앱을 연다.

EBS북카페를 작은 소리로 튼다.


고무장갑은 있지만 끼지 않는다.

맨손에 닿는 물의 촉감과 퐁퐁의 거품을 좋아하니까.

뜨거운 물로 개수대 안 그릇들을 헹군다.

헹구어 내면서 밥그릇,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으로

분류하고 국자와 밥주걱도 한편에 놓아둔다.

수세미에 퐁퐁을 묻혀 거품을 내어 밥그릇부터

차례로 씻어낸다. 그릇 씻기가 끝나면 국 냄비와

12인용 밥솥의 내솥을 닦는다.

거름망의 음식물 찌꺼기를 탁탁 털어 분리수거한다.


북카페에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오, 윌리엄! 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가운 마음이다.

세제통에 퐁퐁을 리필하는 것으로

설거지를 마무리한다. 딱 내가 한 만큼 깨끗해진다.

'정직한 결과물'이것이 설거지의 보람이다.


월요일은 제주 시내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한다.

밥을 지어 점심식사를 하는 회사에는

설거지 당번이 있다. 당연 나는 매주 월요일 당번이다.

(월요일만 출근하므로)


이어폰을 끼고 6층 사무실에서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일흔이 넘은 윌리엄의 철없음과 루시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다시 1층에서 걸어 올라와 자리에 앉아 난로를 켠다.

집중해서 루시가 윌리엄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것을

깨닫는 결말 부분을 듣는다.

맞아 이 소설 그랬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그랬었지.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고.. 그랬었지.

1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서둘러 노트북 안에 독서 폴더를 열어본다.

2월 23일, 인상 깊은 부분을 찍어둔 사진을 찾았다.

루시가 진실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부분과

윌리엄이 자유의지 같은 개소리는 집어치워.

하고 말하던 대목은 지금도 기억난다.

그리고 작가가 콕 집어준 마지막 문단은

나도 좋았던 부분이었다.

설거지를 마쳤을 때처럼 마음이 개운해진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던가.
남편에게 나를 위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 그건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 때까지 모른다는 것.
_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을 빼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화이며, 신비롭다.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이다.

업무시간 딴짓은 여기까지

24일 마감하는 제안서의 키비주얼 작업을

마무리해서 기획팀에 넘긴다.

내 자리 통창으로 눈 내리는 흐린 하늘이 보인다.

퇴근길 시내 큰 길가에도 눈이 쌓였다.

평소보다 늦게 오는 버스를 기다리면 일기를 쓴다.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을 모르겠다.

타인은 더더 모르겠다.

루시가 느꼈던 것을 나도 되새김질한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내 곁에는

내가 한만큼 정직하게 결과를

보여주는 소중한 일들이 있다.

설거지와 제안서 작업 같은...


그리고 작은 기쁨을 주는 것들도 있다.

재밌는 책을 소개해주는 라디오

사무실 난로 위에 놓여있는 귤

내 자리 창가에서 보이는 하늘과 한라산

틈틈이 쓰는 일기까지


집에 가서 맞춤법을 확인하고

사진 정리해서 올려야지.


이렇게

눈이 와서 길어진 퇴근길 두 시간을 글자로 채웠다.


_

너무너무 추운 날 퇴근길 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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