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세계
초등학생 시절, 저녁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티비를 보는 일이 많았다. 저녁을 먹고 같이 티비를 보고 있어도 부모님께서 딱히 말리시는 일은 없었는데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그건 만 12세 시청가였던 드라마 대장금을 볼 때였다. 당시 만 12세가 되지 않았기에 부모님께서
"너는 이거 아직 보면 안 돼. 12살 되면 봐"
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옆에서 계속 봤다. 그리고 12살이 됐던 해, 이미 대장금 드라마는 끝나 있었고 OTT라는 개념이 없던 당시 나는 생각했다. '그냥 옆에서 같이 보길 잘했어.'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대장금을 보려고 했다면 지금도 충분히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 못 봤던 드라마, 영화 모두 지금은 제 값만 치른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세상이 됐다. 20년 전, 부모님 옆에 앉아 티비를 보던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세상이 됐다.
때때로 "10년 뒤의 나의 모습"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2035년의 내가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있는 40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나를 제외한 시간은 얼어붙고 나만 10년이 훌쩍 늙어버린 모습. 내 몸 상태는 어떻지? 가정은 어떻지? 친구들은 어떻게 됐지?
하지만 10년 뒤라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전체 세상이 10년 늙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내게 질문한 이 사람도 10년 후의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사회가 제공하는 경험도 10년 이후의 것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30분 만에 갈 수 있게 되어 생각할 수 있는 활동 반경이 훨씬 넓어진 시대일 수도 있고 안 좋은 일이겠지만 전쟁이 일어나 한숨 잠들기 벅찬 시대일 지도 모른다.
나의 10년도 상상하기 힘든데 세상의 10년은 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수능이 끝나고 정시 발표를 기다리는 쭈글쭈글한 수험생에서 합격 발표를 받은 미소 머금은 당당한 예비대학생이 되기까지는 단 하루면 충분했다. 자그마한 불안감에서 온 세계가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기까지는 한 달 여로 충분했다. 알파고의 출현에서 지엽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서의 AI는 상상했지만 내가 쓴 글을 평가받는 시대가 되기까지도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나이가 든다는 건, 내일이 된다는 건 참 두려운 일이다. 이때까지의 진실이 파편으로 흩어지는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어렸을 땐 30살이 넘어서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고 우리의 소원 통일은 벌써 이뤄졌으리라 믿었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상상했던 30살의 나는 아직도 2000년대 초반에 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는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나 있을까? 지금 예상하는 것 중 얼마나 맞출 수 있을까? 당장 내년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회사 사옥이 옮겨감에 따라 이사를 준비하면서도 당장 4개월 후 퇴사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퇴사 후 꽤 시간이 흐른 지금의 이 모습도 상상하지 못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을 것도 몰랐고 글을 쓰다 이렇게 오래 쉬게 될 것도 몰랐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 계획이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망하지 않는 계획이라고.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미래를 계획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렇게 한 치 앞도 몰라서야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많은 시간을 썼지만 지금에서야 '오늘을 즐겨라'는 말이 단순히 낙관주의적 상상에 빠져 살라는 말이 아니란 걸 이해하고 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고 후회하지 않을 일을 열심히 하며 순간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유동적으로 세상에 나를 맞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자고 일어나면 매일 아침, 새로운 세상이 깨어난다. 나는 보통 설렘이나 기대보다 걱정이 많은 미래를 상상한다. 덕분에 무가치한 불안도 많은 편이다. 기왕 오늘을 즐겨보기로 결심한 이 순간, 조금은 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미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게 좋겠다. 짧은 미래에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보조 팔을 두 개씩 달고 한 번에 훨씬 다양한 일을 해내는 세상이면 좋겠다. 아니면 블루투스 샤워기라도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