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 혼자 집에 있을 때였다. 집을 나서던 엄마의 당부를 받아들여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잠결에 입력된 당부였지만 1) 냉장고에서 꺼낸 삼겹살을, 2) 식탁 위에서, 3) 전기 프라이팬에 구워 먹으라는 세부사항까지 잘 따른, 일종의 보이지 않는 효도였다.
그런데 냉장고에서 갓 꺼낸 삼겹살을 굽다 보니,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았다. 어찌 된 일인지, 삼겹살에서 도무지 기름이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하얗게 질린 고기는 더 이상 구이가 되기를 포기한 채로 찜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태생적으로 체지방률이 유난히 낮은 돼지였던 것일까. 아니면 엄마가,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기름을 도려내 달라고 요청한 특별 삼겹살이었던 것일까. 머릿속에서는 상상 대잔치가 펼쳐진다. 그러는 사이 육즙은 하염없이 흘러나오고, 고기는 점점 메말라 갔다. 물론 뒤늦게 나타난 기름이 불판을 가득 채우면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특수 돼지나 특수 삼겹살에 대한 의심들은 갈 곳을 잃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새 겉은 노릇노릇하고 속은 퍼석퍼석한, 겉과 속이 같은 반-표리부동 적인 삼겹살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비극은 대개 불이 약하고, 그래서 불판이 충분히 뜨겁지 못할 때 일어나는 것 같다. 아마도 잘 냉장된 삼겹살일수록 그 기름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강한 불이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고기를 맛있게 익히는 데에 필요한 것은 육즙이 아닌 기름이고, 기름이 잘 나오려면 강한 불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비단 잘 냉장된 삼겹살을 굽는 상황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연애가 잘 유지된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즙이 앞서는 삼겹살처럼, 마음만 너무 앞서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삼겹살이 맛있게 익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한 것처럼, 연애가 잘 무르익기 위해서는 행동이, 경험의 공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비연애상태를 잘 유지해온 경우라면, 이미 경험 공유의 기능이 얼어붙을 대로 얼어 있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연애세포가 죽었다는 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장기 비연애자는 연애가, 그 관계가 무르익기도 전에 감정만 흘러나오고, 혼자서 감정만 소모하다가 이내 퍼석퍼석한 삼겹살처럼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냉장 삼겹살을 구원해주는 뜨거운 불판처럼, 장기 비연애자를 구원해줄 무언가가 있을까? 아마도 그 답은 상대방과 공유하고 있는 취향의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아무리 좋은 불판이어도 충분한 열기가 없다면 냉장 삼겹살을 구원해줄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측면에서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충분한 공통 취향이 없다면 장기 비연애자를 구원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뜨거운 불판이 차가운 삼겹살에서 기름을 끌어내 주는 열쇠가 되는 것처럼, 공통 취향이 다양해야 얼어붙은 경험 공유의 기능이 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불꽃이 튀는 뜨거운 연애라는 것도 결국 감정의 소진 없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취향의 유사성이 높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취향의 유사성이 높은, 서로에게 뜨거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면 좋아할까, 저렇게 하면 싫어할까 걱정하느라 육즙 같이 소중한 마음을 흘려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바쁘게 경험을 공유하다 보면 소중한 마음을 불필요하게 쏟아낼 여유 자체가 없어진다.
이렇게 나는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슬픈 결론에 도달하였다: 장기 비연애자가 비연애 상태를 종결짓는 것은 힘들다. 경험 공유의 기능이 얼어붙을 수록 취향의 접점이 많은, 서로에게 뜨거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뜨거운 사람을 못 만날 수록 경험 공유의 기능은 점점 더 꽁꽁 얼어붙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리하여 냉장 삼겹살은 오늘도 어쩐지 미적지근한 불판 위에서 애꿎은 눈물만 흘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