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간 곳은 건물 간 거리가 좁은 아파트 단지였다. 커튼을 열면 회벽으로 감싼 작은 창문들이 시야를 채웠고 허들처럼 모인 건물 사이로 깊은 그늘이 고였다. 흔히들 말하는 뷰맛집은 아닌 셈이다. 눈앞이 죄다 가려지자 괜스레 옆동이 고약하게 보였다. 저 건물만 몇 층 낮았더라면(아니면 내가 몇 층 더 높았더라면) 아침 해도 산등성이도, 산새가 날아가는 것도 다 볼 수 있을 텐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가시가 돋아났다.
처음 두 달은 드릴 공사와 한밤의 이삿짐 내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고향을 버리고 온 앙상한 어린 나무들 주변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버린 폐가구며 새 가전을 포장했던 빈 박스들이 무심히 쌓여갔다. 먼지인지 분진인이 알 수 없는 탁한 공기가 계속되면서 알레르기가 도진 얼굴에 붉은 반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도 툭하면 고장 났다. 어떤 날은 장바구니를 들고 11층 계단을 오르기도 했다. 무심히 걸으면 내 발걸음이 온 벽을 흔들어놔 아래층에 어찌 들릴까 몸이 움츠러들었다. 설상가상 건축 실수도 찾아야 했다. 만나자마자 하자를 찾으라니. 마치 소개팅 상대를 만나기도 전에 단점을 먼저 마주한 느낌이다.
이사란 걸 하면 예민해진다. 어떤 소리가, 어떤 향이, 어떤 시야가 내게 일상이 될지 받아들이는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며칠은 많은 걸 듣고 보고 느끼느라 분주하다. 정리와는 별개로 바쁜 내 신체. 네모에서 네모로 이동했을 뿐인데도 참 낯선 공간. 이사란 신비롭다. 이삿짐 어딘가에 파묻힌 작업 재료들을 하나하나 발굴해 내며 마음이 용암을 품은 화산처럼 부글거렸다. 난 대체 언제 작업할 수 있는 걸까. 속절없는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사면을 타고 쌓인 이삿짐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살림살이들. 사방이 막힌 기분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나 보다. 도무지 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며 어느 날 저녁 마주한 남편이 토로했다. 가구가 없는 공간에 울리는 낮은 대화. 이 사람도 나만큼 예민하구나. 어느 집의 새된 웃음소리가 막힌 벽을 타고 들려온다. 낮은 조명 아래 우리 둘의 낯빛은 집을 감싼 회벽보다도 어두웠다.
"우리, 배부른 고민인거지? 다들 우리가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게 실소구나. 새 집으로 오려던 여정은 길었고 남편도 나도 이제야 지침을 마주한 건지도 모르겠다.
여느 날처럼 창밖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지는데 검은색 생물이 이리 휙 저리 휙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뭐지? 무언가 건물 앞 어린 소나무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까치였다. 먹을 것도 하나 없는 이곳에 무슨 일일까, 특이한 녀석이네. 쓰레기만 가득한 곳에 날아든 까치가 의아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건물 아래 오고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새 많이들 이사 왔구나. 고층 빌딩 틈으로 파란 하늘이 가득하다. 느리게 흐르는 구름에 호흡을 겹쳐본다. 숨 한 번에 구름이 몽글몽글 모이다가 흩어졌다.
까치는 이후로도 계속 찾아왔다. 처음엔 한 마리가 머물더니 며칠이 지나자 두 마리가 되었다.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차를 우려 마시고 있다 보면 까치들은 어느새 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다. 무슨 볼일이 있어 이곳을 오는 걸까. 아침을 준비하다 말고 나는 간간히 창가로 다가갔다. 저것 봐, 오늘도 또 왔어. 쟤들은 항상 저 가지에 앉아 있다? 아이들에게 알려주자 모두 창문에 달라붙어 까치에게 인사를 건넸다.
"까치 손님이다, 까치 손님."
"우리 손님한테 밥주자!"
가까이서 본 까치 손님은 보송하고 털색이 고왔다.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털을 부풀린다. 참새는 좀 볼라치면 어느새 날아가버려 눈에 담을 기회가 없었는데 까치는 몸짓도 크고 생각보다 느리다.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 갈 때마다 무게가 실린 가지가 축 축 처져 당황하듯 큰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어느 날, 까치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가지에서 내려와 세 살 아기처럼 어정걸음으로 걷고 있다. 마른 가지들을 툭 툭 건드리다 제법 큰 걸 물어 나무로 날아오른다. 몸집이 통통한 까치가 그러는 사이 좀 더 날렵한 몸집의 새는 먼 곳을 비행하다 돌아왔다. 까치들은 둥지를 짓고 있었다. 저 통통한 새가 알을 품은 걸까?
어릴 적 둥지를 볼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가 마당에 새집을 지어주신 것이다. 집주인은 포르르 땅으로 내려와 집이 될만한 거리를 찾는다. 이 지푸라기 저 지푸라기 고심해서 고른 뒤 단 한 개를 물어 장대 위 집으로 나른다. 이걸 몇 번이고 계속한다. 참으로 힘든 작업이구나,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는걸. 어린 나는 집주인이 측은해졌다. 기다림이 길어서였을까. 아버지가 새집을 내려 어느덧 완성된 내부를 보여 주셨을 땐 환호가 절로 터졌다. 작고 부드러워 보이는 속깃털과 깨끗한 지푸라기가 소담하게 한대 엮인 동그란 보금자리에 작고 하얀 알 네 개가 있었다.
"저희 집 앞 소나무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어요." 커피를 사러 따라간 첫째가 뜬금없이 말한다.
"그래? 좋겠다.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라던데. 좋은 소식을 물고 온데." 친절한 직원은 미소 지으며 대꾸해 주신다. 아이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간다.
아, 맞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작교도 까치가 놔줬고 흥부에게 보물 박씨를 물고 와 보은을 한 것도 까치다. 동화 속 까치는 항상 성실한 사람을 돕는 선행자 역할이었던 것 같다. 새집을 고민하며 남편은 많은 것을 내려놔야했다. 그간 일탈 없이 보낸 우리의 일 년을 하늘이 곱게 여겨 까치를 통해 뭔가를 전하려는 것일까. 갑자기 멈춘 작업이 떠올랐다. 올해 나오려나. 책이 대박이 나려나. 작업대도 없어 이리저리 쪽작업을 연명하고 있으면서 김칫국도 이런 김칫국이 없다.
망상이 너무 컸던 걸까. 까치의 집 짓기는 이어지지 않았다. 완연한 봄이 오기 전에 푸근한 둥지 속 새알을 볼 줄 알았는데 그 기대도 옅어졌다. 어딘가에 지어도 눈에 띄었을 텐데 아무리 창밖을 뒤져도 보이질 않는다. 바람이 살벌해 힘에 부쳐 집 짓기를 포기한 걸까. 애초에 소나무가 둥지를 짓기에 적절했을까. 아니면 이제야 까치들도 햇빛하나 들지 않는 삭막한 이곳을 눈치챈 걸까.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좋은 소식은 오려다가 만 걸까. 시무룩한 마음을 며칠 뒤 찾아온 까마귀 손님이 비웃는다.
까악 까악.
정말, 왜 해피엔딩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겼을까.
창가 손님이 뜸해 질 무렵 나는 정리를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던 지류와 재료를 모조리 꺼내 때마침 도착한 수납장에 분류해 담았다. 이삿짐에 딸려온 오랜 작업물을 버리고 지금 필요한 것들을 보기 편하게 배치했다. 파묻힌 재료들 어딘가에 방치해 둔 마음이 있었다. 새 공간은 새 이야기로 채우면 되었다. 회벽으로 가려진 마음은 시선만 돌리면 볼 수 있는 파란 하늘로 향하면 되었다.
예전부터 창 밖의 풍경이 눈에 익을 때쯤 이사 간 집이 편해지곤 했다. 그곳이 단단하게 가로막은 건물숲이든, 뽀얗게 밝아오던 산등성이든 뭐든 눈에 자주 밟혀 편한 해석이 되면서 안정은 찾아왔다. 이야기가 없던 메마른 창가가 생명들의 움직임으로 읽히면서 풍경이 즐거워졌다. 까치가 이야기를 불어넣어 준 걸까. 어릴 적 나의 마음을 쏙 빼놓았던 커다랗고 폭신한 지푸라기 집과 무심하고 한결같이 움직이던 새의 헌신. 그 안을 옹기종기 채운 새로운 생명들이 그려졌기 때문일까. 풍경이 편해진다는 건 이 공간에서 작업을 다시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붓을 들었다.
좋은 소식은 내가 만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