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일기

구석

by 잔재미양

창원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올라온 지 한 달 차. 살림은 안정이 되었지만, 연이은 휴가에 방학에 만날 사람과 적응하느라 돌린 전화에, 앉을 틈을 만들어도 그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뭐랄까. 실컷 일했는데 엉뚱한 일을 한 기분이다. 내 할 일들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


개학과 함께 오전이 비었다. 썰물처럼 가족들이 빠져나간 거실에 덩그러니 남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들었느냐, 아니 그것도 아니다. 왕왕 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클럽에서 벗어나면 음향이 머리에 계속 남아있는 것처럼, 방학의 여파가, 사람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들리던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것이 물리적으로 그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잔향 같은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집은 더 이상 예전처럼 내가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빨리 작업실을 알아봐야 했다.


갑자기 작업실이 생길 리 없다. 적당한 가격에 알아본 곳은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였다. 날이 더워서였을까. 섣불리 계약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온화한 미소로 공간을 보여주신 분의 친절도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그저 모든 게 다 순순하지 않은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고 집까지 걸어왔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설득했다. 어차피 이 거리면 오고 가기 꺼려했을 것이다라고. 보라고, 이 땀을.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책상을 치웠다. 온가족이 함께 쓰는 넓은 책상 한구석에 둥지를 만들었다. 귀퉁이 작업실인 것이다. 외벽도 프라이버시도 없지만 작업물을 치우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장점과 계약하지 않음으로 아끼게 된 작업실비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굴러다니는 종이를 구부려 삼각대처럼 만들고 큼직하게 적었다.


'이 자리는 8월 29일까지 지혜 씨 마감 치는 자리입니다. 가족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때 작업실을 계약했더라면 마감을 쳤을까. 오늘은 29일이고 난 아직 12장의 스케치가 채색을 기다리고 있다.


-


스케치에서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두세장 그린 그림은 마음에는 들었지만 확신이 없었다. 이전 그림책을 작업하며 길어 올렸던 애정은 온데간데없다. 내 새끼처럼 오구오구 달래 가며 그려도 부족한 시간에 종이 위 주인공들이 뻘쭘하게 남의 자식처럼 날 바라보고 있었다. '지혜 씨, 나 안 칠할 거야?' 뭐였을까, 이 망설임은. 작업은 기세라고, 뭐든 기세라고, 어디를 가도 기세를 말하는데, 정작 기세의 출처를 몰라서였을까, 그 기세라는 게 나타나주지 않았다.


-


단 한 장의 그림에도 서사가 있다. 선이 한 방울 두 방울이 모이다가 어느새 물결이 되고 비로소 마무리라는 단계까지 차오르면 만족이라는 컵이 채워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작에서 끝까지, 지휘자가 지휘를 하듯, 마라토너가 호흡에 맞춰 뛰어가듯, 다양한 행위를 흉내 내어 그림을 그려왔다. 요즘의 나는 어떤 흐름으로 작업하는 걸까. 마음이 턱턱 막히는 걸 보니 방지턱 가득 도로를 운전하는 트럭 기사일까, 메마른 땅을 파야 하는 삽을 든 군인일까. 한 가지 명확한 건, 이대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오롯이 내 것이겠지.



-


적으니까 부유하던 생각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조금씩 적어보기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케아 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