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좋아한다. 마시는 것도, 그 안에 담기는 것도. 어른이 되어 실내 수영을 자주 접하지만 발목부터 차오르는 살아있는 물을 느끼며 바다에 뛰어드는 걸 좋아했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물살은 생각보다 거세다. 파도가 쉼 없이 내 몸을 뒤흔들고 망망대해 가운데 난 너무도 미약하다. 자연의 힘에 압도된다. 발아래 모를 것들이 미끌거리며 밟히고 차가운 긴장이 내 몸을 휘감는다. 사정없이 요동치는 물살에서 빠져나오면 세상이 그렇게 고요하다. 하지만 고민 않고 다음 입수를 위해 숨을 참는다.
육아를 하는 난 종종 물에 들어간다. 물은 불안을 닮아 있어 예측불허 육아 세상에서 불안은 종종 분노라는 가면을 쓰고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할까봐, 제대로 자란다는게 뭔지도 모른 채 추상적인 아이의 풍경을 상상하며 불안은 올라온다. 혼자였을때 평온했던 많은 이들도 아이를 다루며 화를 품는다. 아이라는 거대한 대자연에 휘말려 이리저리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나를 불러대고 매 순간이 시험이다. 그날의 복기를 미루고 예습 없이 맞이한 다음날은 곧잘 감정이 망가질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럴 때 잠시 쉬려고 숨어 들어간 화장실이 그렇게 위로가 된다. 볼일을 마치고 문을 열기 전 다시 육아에 투입되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이 육아라는 물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난 오늘 또 얼마만큼 숨을 참아야 하는 걸까. 해발 3천 미터까지 들어갈 수 있는 고래를 닮고 싶어 진다.
고래는 평생을 물속에서 숨을 참다가 호흡을 위해 깊은 바다에서 수면 위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놀랍게도 고래의 뼈 구조는 물고기보다 사람에 가깝다. 등과 꼬리지느러미도 없고 길게 이어진 척추뼈가 꼬리까지 이어진다. 물고기의 모습이지만 고래는 땅에 살던 포유동물에서 바다로 서식지를 옮기면서 진화한 동물이다. 뒷다리가 있었지만 퇴화 과정에서 없어졌다는데 그래선지 태아일때 잠깐 나타난다고 한다. 여느 표유류처럼 한 마리의 새끼만을 낳고 아가미가 아닌 폐로 숨을 쉬는 특성 때문에 갓 태어난 새끼는 어미가 물 밖으로 내보내 숨을 쉬게 도와준다. 살기 위해 물 위로 떠올라야만 하는 것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고래들이 분수공으로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줄기를 바라본다. 저 물줄기는 나의 분노를 닮았구나. 분노는 바닷물과 같아서, 없앨 수도, 없어지지도 않는 내 일부다. 그런 감정을 없앤다는 것은 바닷물을 말려 없애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일 테지. 그렇기에 저 드넓게 펼쳐진 분노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이따금씩 숨을 쉬기 위해 올라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부하 걸린 감정을 분출하면, 다시 물속으로 숨어 들어가 몸을 감출 수 있다. 다음 분노가 허파에 차오르기 전까지 말이다.
고래의 숨구멍에서 내뿜는 물줄기의 모양을 보고 어느 종류의 고래인지 분간한다는데, 육아를 하는 많은 고래들이 여기저기 수면 위로 올라와 서로의 분노를 발견하곤 위로를 건네는 모습이 겹친다.
고래처럼 내 안에 분노가 차오름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오늘처럼 내 아이에게 덧없이 내뿜지 않았을 텐데. 후회하고 공부를 해도, 스스로를 다독여도 바다의 물질은 시시각각 분노의 색을 띤다. 그건 또 나를 저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게 하겠지. 그럼에도 숨을 쉬기 위해 기를 쓰고 수면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저마다의 바다 한가운데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난 역시, 물이 좋다.
그 속의 나는 한 마리의 고래처럼 기운차고, 필사적이고, 또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