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입학식과 자동차

by 오늘의날씨는

"차고지 증명서 있으신가요?"


이게 무슨 소리야 드디어 새 차를 타는 건가 싶어 기대감에 들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직원의 질문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은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대화를 이어갔다.

신청 방법은 맨션의 관리회사나 부동산에 연락하여 주차장 이용 신청을 하면, 보통 2주 안으로 해당 서류를 받을 수 있다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차를 구매하려면 내가 차를 주차할 공간이 있다는 걸 국가에 증명해야 하고, 맨션에 매달 이용료를 지불하며 주차장을 유료로 이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주차장은 원래 무료 아닌가?’ 하는 한국적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도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가 싶던 찰나, 직원은 계약금을 사전에 받았으니 차를 정식으로 인도받기 전까지 탈 수 있는 경차 한 대를 내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낡은 경차에 오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모든 일이 한 번에 시원하게 해결되었다면 차라리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텐데. 차를 기다려야 하는 2~3주라는 시간의 공백은, "내가 혹시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파고들기에 너무나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안을 곱씹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아는 것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뒤탈을 만들지 않으려면, 눈앞에 놓인 할 일들을 부지런히 해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차고 증명서에 대해 알아보니 직접 경찰서에 가서 신청하는 방법과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처럼 법인 계약과 관리 회사가 있는 경우에는 담당 회사를 통해서만 진행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 달 주차비만 10만 원 초중반대, 여기에 서류 대행 수수료까지... 잘 몰라서 두 번 세 번 발걸음 하느니 한 번에 정확히 처리하는 게 속 편하긴 했지만, 패밀리카 한 대 장만하기 위해 들어가는 부대비용은 생각보다 뼈아팠다.


돈만 많으면 한국이 제일 살기 편하다고들 하는데, 일본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여유로운 생활과 정해진 절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더 매력적 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를 신청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늦잠을 자는 사이 출근하던 남편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여보, 차 시동이 안 걸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차가 완전히 퍼진 건지 원인조차 알 수 없었지만, 낯선 환경에 한참 적응 중인 주재 생활에서 지각만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고장 접수처에 전화를 걸었다.

안 되는 일본어를 필사적으로 쥐어짜 상황을 설명하고 위치를 전달하는데 말문이 막히는 질문이 들어왔다.


“차 번호판 불러주세요.”


아차 싶었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한국식 한자조차 읽는 법이 가물가물한 판국에 일본식 한자 더구나 지명이 담긴 번호판을 말해달라니.. 뇌 회로가 정지된 듯한 정적 속에서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번호판 대신 자동차 대리점 이름부터 구매자의 온갖 신상정보까지, 묻지도 않은 TMI를 쏟아부었다. 상대방이 당황하든 말든 일단 내가 아는 모든 일본어를 탈탈 털어준 뒤에야, 가까스로 긴 통화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멋지게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건만, 현실은 단어 하나에 쩔쩔매는 서툰 이방인일 뿐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쏟아낸 나의 당황스러운 말들이 공중에 흩어질 때마다 밀려오는 창피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쯤 전화벨이 울렸다.


무사히 출근 잘했고 문제도 잘 해결되었다는 연락이 왔는데, 그 모든 소동의 원인은 허무하게도 자동차 배터리 방전이었다.

그동안 오토 라이트 기능이 있는 차만 이용했던 터라, 대여받은 차가 오래된 구식이라는 걸 잊고 라이트를 켠 채 주차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하하..."

허탈한 웃음과 함께 좀 전의 전화통화가 다시 떠올라 조금 울컥했지만 어찌어찌 해결되어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긴, 낯선 곳에 적응하고 아이들을 보느라 외출이 힘든 나를 대신해 행정업무 그리고 새로운 일까지 배우느라 그도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내색은 안 했지만 남편도 그동안 쌓인 피로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작은 해프닝이 마무리되고, 어느덧 아이들의 입학식이 다가왔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전부 사실은 아니지만 입학식 옷차림으로 두고두고 입방아에 올랐다는 괴담 같은 일화들은 지역 커뮤니티의 단골 소재였다.


거울 앞에서 몇 번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다 결국 내 선택은 당장 면접을 봐도 손색없을 법한 베이지색 슬랙스에 단정한 흰 셔츠였다. 자칫 밋밋해 보일까 싶어, 예의를 갖췄다는 느낌으로 스카프 한 장을 신중하게 둘렀다. 남편 역시 튀지 않는 무채색 차림으로 조용히 현관문을 나섰다. 오늘은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는 조용한 배경이 되어 입학식을 마무리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놀러 가는 줄 알고 마냥 천진난만했다.

아이들의 저 해맑은 웃음이 본격적인 유치원 생활이 시작된 뒤에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품은 채 유치원 정문에 다다랐다. 유치원 정문 앞에는 입학식을 알리는 커다란 간판이 서 있었고, 그 앞에서 이 특별한 시작의 순간을 남기려는 가족들로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해 설레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려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야, 교직원의 안내에 따라 긴장감이 감도는 강당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피는데, 내 앞자리에 단정한 기모노를 차려입은 학부모가 보였다.

순간 "어? 이 정도로 해야 한다고?" 고개를 숙여 내 옷차림을 확인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파스텔 톤 원피스나 정장 차림들이 보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입학식에 집중했다.

교장 선생님의 인사와 교직원 및 반 소개가 이어지고, 같은 반끼리 단체 사진을 찍고 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이동했다.


반 분위기를 살펴보니, 만 2세 반부터 함께 지내며 이미 친해진 아이들도 있었고 우리 애들처럼 처음 입학한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친밀도나 적응은 결국 시간문제겠지만, 여전히 언어 부분이 마음에 걸려 마냥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행히 4월이 지나기 전 차고 증명서가 발급되었고, 그 시기에 맞춰 한국에 있던 차도 매물로 올리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팔렸다.

구매자는 전문 딜러였는데, 연식에 비해 주행거리가 거의 새 차 수준이라며 무척 만족해했다.

복잡한 서류 처리까지 수수료 없이 대행해 주겠다고 장담하더니,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하루 만에 잔금이 입금되어 오히려 조금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일이 너무 일사천리로 풀리니 "혹시 더 비싸게 팔 수 있지 않았을까?" “작년에 팔걸..” 뒤늦은 미련이 잠깐 스쳤지만, 이미 떠난 차에 할 수 있는 거는 없으니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환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입금 마감일까지는 5일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남편은 "마지막 날에 입금하자"라고 했고, 나는 "준비됐을 때 미리 해야 차를 하루라도 빨리 받지 않겠냐" 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승자는 나였다.

송금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또 어떤 서류를 달라고 할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지금 차를 받아야 첫 정규 수업 날 우리 차로 아이들과 기분 좋게 등원할 수 있다는 말에 남편도 결국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금을 완료하고 메시지를 보내자,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는지 반가운 답장이 도착했다.


"내일 차량 점검이 완료됩니다. 모레부터 바로 인도받으실 수 있습니다. 언제 방문하시겠어요?"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돈의 논리 앞에서는 국적도 성별도 다 필요 없는 법이다.

예상했던 기간보다 차 점검이 훨씬 일찍 끝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 가족의 차로 등원하던 첫날

나는 10년 된 미니밴을 샀더라면 후회했을 광경을 마주했다.

유치원 정문 에는 온갖 고가 브랜드의 차량이 즐비했고, 차에서 내린 학부모들이 아이들 배웅하고 있었다.

고가의 차량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의 번듯한 얼굴이 되어준 차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 보이지 않는 기싸움에서 무난히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옷에 이름을 새기고 우리 가족이 탈 차를 마련하는 것

평범한 일들을 하나씩 일궈내며, 우리는 비로소 이곳에서의 진짜 일상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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