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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Jun 23. 2019

감사, 너무 시끄러운 시인의 용돈

파란만장 감정지도


보통 살면서 감사할 일이 많은 게 정상인데, 부끄럽게도 난 그렇지 않았다. 20대의 반항심 때문인지 세상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매사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다. 과거를 더듬어보니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 도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운명의 특별한 혜택이었다. 그중에 철없는 20대가 가질 수 있는 행운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행 중 한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90년대 인도 관련 책들이 붐이었고, 한국사람들은 너도나도 인도로 향했다. 6개월을 여행하며 여름방학을 맞이한 단체 여행하는 학생과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가 한국인지 인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90년대 한국인들에게 인도가 어떤 비밀의 문을 가진 나라로 인식하던 시대였다. 나도 그랬다. 중국 실크로드를 넘어 파키스탄을 지나 인도 북부를 여행 중이었다. 1년 6개월째 아시아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떠돌이 노숙자처럼 보여서, 인도인들은 아무도 나를 여행객으로 보지 않았다. 다녀온 사람은 아시다시피 거리에서 관광객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편안하게 혼자 인도 북부 델리부터 찍기 시작했다.


유골이 강에 뿌려지면 극락에 간다고 믿는 성스러운 곳 바라나시 갠지스강, 첫인상은 매캐한 냄새였다. 아이러니하게 화장터 가는 길에 결혼식 행렬을 만났다. 인도 남녀가 꽃가마를 타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바싹 마른 8명의 남자들이 꽃가마를 어깨에 메고 위아래를 흔들고 있었다. 보기에도 몇 백 킬로는 될듯한데 아래위로 흔들며 행진하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신혼부부를 떠받들고 있는 천민계급의 젊은 청년들을 보니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행렬을 뒤로하고 강가로 향했다.



릭샤를 타고 강가를 마주한 숙소를 찾고 있었다. 마침 강가 벤치에 앉아 있는 인도 전통복장을 한 동양 여인에게 길을 물었다.


"한국분이세요?"

"네. 숙소 찾으시나 봐요?"

"혹시 싸고 강이 보이는 숙소 아세요?"

"마침 제가 있는 곳이 좋아요. 따라오세요."


그녀는 한국인이었고 추천하는 숙소로 정했다. 짐을 풀고 숙소 노상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데, 아까 가이드해준 여인이 손짓을 했다. 그녀 앞에 한 중년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긴 머리와 짙은 검정 선글라스를 낀 남자, 시인 류시화였다. 그는 가족들과 여행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며칠째 여행 중?"

"대충 1년 넘었습니다. 선생님 책 읽으면서 다니고 있는데.."

"선생님은 무슨... 안내해준 이 분은 내 와이프, 요놈은 아들 미륵."


느린 중저음 목소리와 남성적 카리스마, 큰 키에 긴 머리와 검정 선글라스는 마초적인 얼굴에 지적인 이미지까지 완벽해 보였다. 그의 첫인상은 다정다감하고 친절했다. 어쩌다 합석해서 그와 함께 여행 스케줄을 맞추게 되었다. 마침 여행 중 읽고 있던 티베트 사저의 서인데, 번역가를 만났으니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 유명인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았지만 곤란한 상황도 있었다.


노상카페에서 류시화와 난 커피 한잔을 하고 있었는데, 그를 알아본 10여 명의 한국 팬들이 달려들더니, 나를 밀치더니 그를 에워쌓다. 커피를 쏟으며 난 넘어지고, 그는 사인과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놈의 팔자는 국내에서 인기 없는 건 해외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창창한 20대 청년이 중년 아저씨에 밀리다니. 쏟아진 커피잔을 들고 뒤에서 우두커니 선채 그를 바라보았다. 속으로 ‘부러우면 지는 거다. 아저씨한테 질투하는 것 아니다. 정말’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웃으며 사인해주는 류시화를 보며 아주 잠깐 미웠다. 그의 주변은 항상 시끄러웠고 유명하다는 것이 불편해 보이는 점도 있었다.


그는 내 기분을 알았는지 갠지스강에서 함께 배를 타기로 했다. 저녁 무렵 배를 빌리고 강에 띄울 100여 개의 촛불을 마련했다. 형형색색의 꽃과 초를 바나나 잎에 올려놓은 디아를 강 위에 띄워 소원을 비는 행위다. 우리는 사두 한 명을 섭외하고 강 중앙에서 차례로 한 개씩 흘려보냈다. 사두는 북소리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갠지스강에 띄워진 백여 개의 촛불이 일렬로 떠내려가며 장관을 이루었다. 여행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밤으로 기억되었다. 훗날 류시화 시인이 갠지스강에 디아 천 개를 띄웠다고 한국 여행객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난 그가 그렇게 유명한 작가인 것을 여행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서 알았다.


다음날 갠지스 강이 보이는 노상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번역한 티베트 사저의 서에 관해 물었다.


"여기 이 문장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어렵고 난해한 문장들을 예를 들어 설명해 주었다. 20대인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답을 애를 쓰며 이해시키려 했다. 알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과 제자처럼 문답을 이어갔다. 난해하고 어려운 인생문제를 이해시켜주려고 하셨다.


“저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살아야 될지 방향을 모르겠어요.”

“계속 넘어질 거야. 넘어지고 일어나다 보면 언젠가 너의 불행이 축복이 될 날이 올 것 같다.”


그렇게 같이 보내는 여행은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나는 남쪽으로 가고 시인 류시화는 북쪽으로 향했다. 떠나는 날 꽤 큰돈을 내 손에 쥐어주며 여행 잘하라고 격려해주었다. 우리는 짧고도 긴 시간을 함께 하며 헤어졌다. 지나고 보니 시인 류시화가 준 인도 돈보다 질문에 대한 답이 더 기억에 남는다.


당장 필요한 물질적인 혜택은 며칠간 고맙게 느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어버린다. 한때 같이 동고동락했던 친구를 먹여주고 재워주었더니 나중에 용돈까지 달라고 했다. 고마운 줄 모르고 안방까지 내놓으라는 경우가 있었다. 무한정 물질적 배품은 상대를 더 못된 습관을 고착화시킨다. 진짜 나눔이란 정서적 교류를 통한 소통에 있다. 시인은 내 정신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고, 그것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대가성 없는 나눔을 받았을 때 우러나올 때 느끼는 감사, 이때 머릿속에 풀리지 않았던 매듭이 풀렸다. 성숙의 단계에서 항상 끝맺음은 감사였다.


물질이 아닌 정신적 교류를 통한 성장이어야 진심에서 나오는 감사함을 느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면 깊이 느껴지는 감사는 몇 번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찾고 강의를 듣고 사람과 대화를 하나보다. 인생은 감사를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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