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무에타이를 배워봤다.
무에타이를 배워야 할 이유 : 없음
무에타이를 배우지 말아야 할 이유 : 피곤함 나이가 많음 무서움 무릎이 아픔…
치앙마이에 왔다. 1999년 처음 방문한 이래 벌써 네번째 방문인 치앙마이는 속속들이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조금 식상하게 느껴진터였다. 사실 원래는 아유타야나 수코타이나 깐차나부리나 푸켓이나 뭐 그런 한번도 안 가본 곳을 가보려고 했다. 어차피 겨울에 친구랑 다시 태국을 여행하기로 했으니까, 이번엔 그렇게 한번도 안 가본 곳을 딱 한군데만 들러서, 2주 남짓의 여행기간 내내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이나 하고 맛있는 것이나 먹고 밀린 책을 왕창 읽어야지 했다. 근데 어느새 치앙마이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에타이 도장 옆의 카페에서. 그리고 이 곳에서 나는 벌써 두 시간 째 무에타이를 도대체 내가 왜 배우려 한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품으며 앉아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에타이를 배워야 할 이유는 없고 배우지 않아야 할 이유만 잔뜩이다. 무엇보다 난 벌써 40살도 한참 넘은 나이란 말이다.
40이 된다는 것은 이제 제 멋대로 구는 몸을 살살 달래가며 쓰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뜻이다. 주5일 새벽수영을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매일 수영을 하고 돌아오면 몸의 어딘가가 욱신하게 쑤신다. 물론 그 직전 나의 몸 상태는 극심한 불면증 운동부족 비만 암수술 호르몬제 복용 등으로 인해 딱히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수영으로 몸이 좋아졌다 싶어서 호기롭게 자전거까지 탔다가 일주일만에 몸살로 드러누워 한달을 헤멘건 좀 너무하다 싶다. 게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무에타이라니? 주짓수도 하루 시험삼아 해 보고는 이내 포기해 놓고서?
사실은 얼마 전 읽은 브런치 글에서 한 작가분이 무에타이를 배우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나도 따라해 보고 싶었다. 여자는 역시 가오 아닌가 말이지. 게다가 내 절친이 예전에 내게 무에타이를 권유했을 때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주변에 마땅히 배울만한 곳이 없었던 것도 있다. 절친은 한참 스트레스가 극에 차올라 아무라도 패고 싶어서 배웠다는데 그 덕분에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농담이겠지…?) 했다. 그간 암벽타기나 국궁 등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생각해 보니 어느새 내 나이가 더 이상은 뭔가를 미뤄서는 안 되는 나이처럼 느껴진 것도 있었다. 50대가 되어서 가르쳐 달라고 했다가는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노인 공경이나 당할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생각하니 또, 이번에도 암벽타기 처럼 미뤘다가는 영원히 배울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래. 문제는 배울 이유 따위가 아니다. 문제는 나의 이 소심한 성격이다.
그래서 4시 수업을 듣겠다고 결심하고도 12시 부터 전전긍긍하며 그래서 등록해 말아 하는 쓸데없는 고민이나 주구장창 하며 무에타이 도장 옆의 커피숍에 앉아있다. 원래는 어제 등록을 하기로 해 놓고 호텔에 누워 소설을 보다가 그 핑계로 눌러 앉아 버렸기 때문에 오늘은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고자 일찌감치 여기 앉아 있는 것이다. 그래! 배우기야 노인도 애들도 배운다는데 나라고 못 배울건 또 뭐야. 그렇지만 그 전에 우선 무시무시해 보이는 도장에 들어가서 상담을 하고 등록을 하고 이것저것 안되는 영어로 대화를 하고 운동을 하고 인사를 하고 나와야 한다. 생각만 해도 방금 먹은 말차 프라페가 역류하는 것 같다.
수영은 어떻게 다녔더라? 수영은 대충 물에 들어가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한 뒤, 열심히 물장구 치고 나와 씻으면 된다. 정말 한 마디도 안 할 때가 더 많다. 나는 일단 시력도 안 좋은 데다가 사람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고급반이 된지도 벌써 3개월째인데 여전히 누가 누군지도 구별도 못한다. 누가 수영장 입구에서 아는체를 하면 그제야 허겁지겁 인사를 하는 터라 엄청나게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찍혔을지도 모르겠다만…그래서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래도 이건 잘못된 결정인 것 같다. 호텔에서 수영하고, 조식먹고, 글쓰고, 책 읽고… 그런 호캉스를 하러 와 놓고 이게 무슨 짓이냔 말이다. 무에타이라니…. 하지만 이 무에타이 도장 옆 커피숍에서 호텔까지는 걸어서 한시간이 넘는 거리이고, 여기까지 와 놓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친구한테 큰소리도 쳤단말이다…그러니 어쩔수 없다. 다행인것은 아무도 내가 이 정도로 소심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좀 피곤한 척, 까칠한 척, 하지만 되게 똑똑한 척? 아니…그런거 다 모르겠고 일단 무사히 오늘 하루를 끝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