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났다.

방콕, 여행의 시작과 끝

by 루미

2025년을 카오산 로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맞이하면서, 내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번 여행이 내 마지막 여행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아마 다른 이유에서 여행을 다시 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처럼 여행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 확실했다.


딱히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내 인생은 몇개의 챕터로 나눌 수 있다. 10대는 학업, 20대는 여행, 30대는 반항과 방황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40대는? 재활과 재생이랄까?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여행이 예전같지 않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방황에는 그래도 여행이 어울리지만 재활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도 내가 여행을 그토록 좋아했는데, 이렇게까지나 아무런 감흥이 없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여지껏 정확히 30개국을 돌아다녔는데, (그것도 최장 4-5개월 가량 한 국가에 머물기도 하면서) 아직도 어떤 놀라움이나 감흥 같은게 남아있기는 어려운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카오산 로드는 거의 10년 만이었다. 아닌가? 신혼여행 이후에도 미얀마와 라오스 취재 등으로 인해 몇 번 경유했으니까.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신혼여행으로 왔던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그 다음의 기억들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오랫만이어서인지, 내 머릿속에는 첫 여행의 떨림으로 방황했던, 남친이자 남편이었던 남자와 썸을 탔던, 처음 보는 남자와 키스를 하고 방을 찾아 헤메던, 혹은 지나가다 우연히 친구를 만났던, 하필 국왕 생일이라 술을 파는 곳을 찾아 헤멨던... 그 모든 미친 기억들이 정말이지 폭포처럼 밀려들었다. 마치 12월 말일, 온갖 인파들이 몰려 대마와 술을 퍼붓는 카오산 로드 그 자체였다.


덕분에 오랜만에 우울하다기 보다는 약간은 멜랑꼴리한 감정으로, 그래도 태국은 처음인 친구를 위해 애써 그런 감정을 숨기며 방콕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첫 여행 이후, 방콕에는 별 흥미가 없어 거의 머물지 않지만 이번에는 친구가 원해서 방콕에서 무려 7박이나 했다. 그리고 최근 여행 트렌드를 따라 잡아 보겠다며, 별 취미도 없는 대형 쇼핑몰이나 실크 아울렛 등을 돌아다녔다. 나야 어차피 아무런 여행 욕구가 없었으므로 친구가 원하는 곳이라면 다 돌아보았던 것이다. 친구 역시 나와 비슷해서 그런 곳들엔 취미가 없어보였지만, 뭐든 직접 경험을 해야 판단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끄라비, 피피, 라일레이로 향했다.


열심히 야시장도 가고 스노쿨링도 하고 카약도 저었다.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소소한 기념품도 구입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새롭지 않고 무엇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태국 사람들은 친절했고, 서양 여행객들은 무례했으며, 친구는 여행을 즐거워했다. 날씨는 미친듯이 좋았고, 이번에 처음 묵어본 라일레이는 내가 묵어 본 해변 중에 가장 예뻤다. (가장 아름답다...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이 정말로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라는 것은 점점 더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태 여행이 왜 그렇게나 좋았는지, 왜 그렇게 틈만 나면 여행을 가려고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래도 참 오래 여행했다 싶다. 원래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들다가도 금세 지겨워지는 성격이었는데도, 여행은 그렇게 열심히 오지를 돌아다니면서도 계속 하고 싶어 했고 즐거워 했다. 그래도 결국 이것도 끝이 오는 구나 싶다. 그러고 보면 한때는 함께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도 되지 못한다는 소리를 했었는데, 이제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내가 여행지에서 읽는 책보다는 집에서 읽는 책이 더 좋고, 리조트에서의 유유자적한 수영보다는 집 앞 수영장에서의 전투 수영이 더 좋아져 버렸다. 나 자신조차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변했다.


문득 라오스 방비엥의 한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수영장도 없고, 그저 허름한 대나무를 얼기 설기 엮어 만든 방갈로에 묵으면서, 사람들은 모두 와이파이가 되는 작은 공간에 모일 수 밖에 없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와이파이를 하다 친해진 사람들끼리 저렴한 꼬치구이와 맥주를 마시며 내린 결론은,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서 도피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명문대를 졸업해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상태로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방황을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답을 내리겠지 하던 것이 몇번의 취업과 퇴직, 전직 시도, 도피성(?) 결혼까지 실패로 끝나면서 거의 20년을 방황해 여기까지 왔다. 그 방황은 불과 6개월전까지 계속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야 끝이 났음을 실감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진심이었던 한 남자와의 인연이 완전히 끝이 났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던 것 처럼, 이번의 깨달음 역시 뒤늦은, 그러나 어찌하면 한치의 미련도 없는 완전한 끝이었다. 끝이라서 아쉬운 기분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동안의 시간들이 스스로도 너무나 혼란스럽고 어렵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뭔가 얻어진 것은 없지만 어떻게 가야 할 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았다는 것 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목적지를 알았으니, 이제는 그냥 그곳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리하여 매우 후련한 기분으로, 환전한 달러를 전부 탕진...하려고 했지만 결국 다 쓰지는 못한 채로, 방콕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귀국했다. 첫 여행지와 마지막 여행지가 모두 방콕이라니, 뭔가 수미쌍관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젊고 가난한 배낭여행자들로 북적이던 카오산 로드는 이제 그 여행자들이 아이나 남편들을 데리고 방문하는, 나이든 여행자들의 추억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 내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나겠지만 청춘들은 여전히 방황을 하고, 자신만의 결론을 찾게 될 것이다. 모두의 방황을 응원하고, 모두가 자신만의 길을 찾기를 바란다. 물론 나 역시 마지막이라는 확신과 달리, 훗날 더 이상 방황이 아닌 그저 여행 그 자체로써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수도 있겠지 싶다. 아마도 그때의 여행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형태가 되겠지만.


그 모든 방황의 순간, 나를 돌아봐 주고 선한 마음을 보여준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하고 다정하며,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이타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이곳에 돌아와,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마다 제대로 된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다들 나보다 훨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테니까. 나는 그 사람들의 따뜻함을 간직한 채 다음 챕터를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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