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체감’
일본에서 처음 누군가와 약속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상대는 1시 55분에 이미 도착해 있었고, 나는 1시 58분에 도착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와줘서 고마워”라고 했다.
‘늦어서 미안해’가 아닌 ‘와줘서 고마워’.
이 작은 문장에서 일본의 시간 감각이 다르게 느껴졌다.
“정시에 늦지 않는 것”의 기준
일본인에게 ‘정시’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 가깝다.
10시에 만나기로 했다면 10시 정각, 혹은 그보다 5분 이내가 이상적이다.
‘조금 늦을 수도 있지’라는 관념은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출근길 지하철이 1분만 늦어도 ‘사죄 방송’이 울리고, 역무원이 깊이 고개를 숙이는 나라니까.
그렇다고 ‘분 단위로 칼같이 굴린다’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정시 문화는 굉장히 조용하고 부드럽다.
누군가가 지각을 했더라도 바로 지적하기보다, 스스로 민망함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
함께 기다려주는 쪽의 태도에서도 ‘관용’보다는 ‘습관화된 배려’에 가깝다.
반면, 시작과 끝은 흐릿하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약속은 제시간에 시작되지만, 끝나는 시간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2시간짜리 스터디가 2시간 15분을 넘기더라도, 누구 하나 시계를 보며 ‘그만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읽고 슬그머니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칼같이 흐르기보다는, 기류처럼 흘러간다.
느긋한 듯 정교한 구조
일본인의 시간 감각은 ‘빠르다’도 아니고 ‘느리다’도 아니다.
정확하게 맞추되, 서두르지 않는다는 철학이 느껴진다.
특히 업무에서는 마감일을 여유롭게 주지만, 정작 중간 중간의 진행 상황은 굉장히 세밀하게 체크한다.
전체적인 페이스는 천천히 흐르지만, 안에서는 치밀한 준비가 계속된다.
한국에서라면 ‘이렇게 여유 부리다 진짜 괜찮은 거야?’ 싶을 정도로
사전 준비와 완급 조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외부인의 눈에는 여유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여유가 만들어지기까지
매우 정돈된 ‘시간 설계’가 있는 셈이다.
한국과의 미묘한 충돌
나는 초반에 이 문화가 답답했다.
회의를 시작하고 20분이 지나도록 본론에 들어가지 않고,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다음에서야 본 주제로 넘어가는 그 ‘여유’가 낯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그들의 느긋함은 ‘미룸’이 아니라 ‘준비된 흐름’이고,
그 여유로움이 상대에 대한 존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 배운 시간의 또 다른 이름
‘시간을 지킨다’는 건, 단순히 지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를 중심에 두고 내 계획을 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본에서 알게 됐다.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 10분 먼저 출발하고,
상대가 말하는 시간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느린 대화 속에,
‘시간은 곧 존중’이라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지금도 일본에 살며 약속 장소에 5분 일찍 도착한 나를 보면,
예전의 나는 꽤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는 동안, 시간은 단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