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 Cartoon
얼마 전에 미장원(이제 hair shop이라고 해야 하나요. 너무 오래된 말 같아서요. 그런데, 막상 쓸 때는 다른 단어가 잘 대체가 안되네요. 헤헤)에 가서 파마를 했었습니다. 미장원은 머리를 텅 비우고 최근 잡지를 뒤적일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이잖습니까. ^^ 그날도 손에 힘을 하나도 안 주고 설렁설렁 펄럭펄럭 잡지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문소리 배우님과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님의 대담 기사였구요. 우리나라 여성 배우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간에 나온 내용이었는데요. 한번 같이 봐주시겠어요? (기사의 일부 내용을 사진 찍어 와서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문소리 : 김선영, 이정은, 장혜진, 이런 사람들 연기는 클래스가 다르다. 이 배우들의 활약이 정말 기대된다. 남자 배우들은 연극판에서 잘한다 소리 듣고 오래 버티면 기어이 잘되더라. 40대부터 새로운 운이 트이니까 기다려보라고 말하곤 했는데 여배우들에게는 차마 그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사례가 없었으니까. 30대 초반까지 잘 안 되면 연극에서 이런저런 역할만 전전할 뿐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데 롤모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연극 무대에서 내공 깊은 분들이 잘되는 게 얼마나 많은 여배우들에게 큰 희망이 되겠나” (Vogue, 2019년 10월호, Vogue Cinema p168)
이상하게 굉장히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 부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다시 읽었거든요. 요새 정말 두근두근하면서 빼놓지 않고 챙겨가며 보고 있는 드라마 “동백꽃 필무렵”의 김선영 배우님과 이정은 배우님(지난주에는 장혜진 배우님도 잠깐 나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극장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하며 보았던 영화 “기생충”의 이정은 배우님과 장혜진 배우님의 이야기가 나와서 그렇기도 했지만요. “롤모델”이라는 말이 오랜만에 크게 다가왔습니다.
더 어렸을 때에는 다음에 할 일이 뚜렷했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 대학에 가는 것. 학점을 따는 것. 졸업을 하는 것. 취직을 하는 것. 대학원에 가는 것. 박사학위를 따는 것. 전문가 자격증을 따는 것. 솔직히 40대쯤 되면 어느 한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전문가 소리 들으면서 일하고 있겠지 라는 기대를 20-30대에는 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40대가 되어도 “도대체 어떻게 내 삶을 꾸려가야 할까,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내가 지금 맞게 살고 있긴 한 건가”에 대한 고민은 점점 더 커져 가더라구요. 막막하고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에 주저앉아서 우앵앵앵 울고 싶을 때가 참 많았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하면 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그냥 따라만 오라니까!”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했구요(솔직히 만약에 누가 그런 말을 해준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믿어!”하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안 따라갈게 뻔하지만요. 허허). 제가 바라보고 컸던 선배들은 하나의 직장과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평생 그곳에 계시는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제 삶을 보면 매일매일 내일의 삶을 내가 알아서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앞에 걸어간 선배들의 발자국만을 따라가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문득 기억나는데, 제 어릴 때의 롤모델은 셜록 홈즈였습니다. 모든 문제를 풀어내고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명석함, 날카로움이 부러웠었지요. 그런데 상담계로 들어오면서 그런 인지적인 능력 외에도 감정과 관계,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갖게 되면서 홈즈에 대한 존경심의 형태가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상담 분야에서 정말 정말 정말 멋진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롤모델들이 새롭게 추가되었지요. “나도 저런 상담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상담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상담전문가로서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말과 행동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가득했었습니다.
선배 선생님들의 모습을 어설프게 흉내내느라 진땀 흘리며 달려왔던 과정을 거치면서, 상담심리학자 – 비즈니스 코치 - 1인 기업으로 혼자 서서 활동하게 되는 시기가 되자, 이제 또 다음 단계의 롤모델이 필요해졌습니다. 누군가는 제게 “이제 롤모델을 찾을 때가 아니라, 너 자신이 후배들을 위한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셨지만, 저는 항상 바라보고 따라가고 싶은 분들을 찾고 싶어하는 편이거든요. 롤모델은 단 한 사람만을 정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copy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모습에서 제가 인싸이트를 얻을 수 있는 작은 부분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내 스타일에 맞게 맞춤화 작업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까, 표현을 좀 바꿔보자면, 롤모델의 숫자와 관련 분야가 확장되었다고나 할까요.
얘기가 잠시 옆으로 빠졌었지요. ^__^ 다시 잡지 기사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문소리 배우님과 백은하 소장님의 대담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만화가 “80세 마리코(오자와 유키 / 대원씨아이 / 총 16권 완결 )”였습니다. 저는 신간이 나오기를 두근두근 기다리며 만화책을 사서 읽는 스타일입니다. 만화서점에 가서 새로 나온 책 코너를 구경하다가, 제가 모으고 있는 만화책이 나온 것을 봤을 때, 서점에서 제가 좋아하는 만화책의 신간이 나왔다는 문자가 왔을 때, 가장 행복하고 신나하거든요. 계속해서 신간을 사서 모으고 있는 만화책 시리즈도 30종류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중에서 최근에 읽으면서 마음이 두근두근 울렁울렁 콩닥콩닥해지고,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나중에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 만화책이 “80세 마리코”였습니다. 새로운 롤모델을 만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평생 해오던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주저앉아서 탄식과 세상에 대한
원망만을 늘어놓거나
그저 남아도는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너무 무섭지만
새로운 환경에 용감하게 뚜벅뚜벅 걸어들어가고.
너무너무 두렵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싸우고 알아가고
너무너무 어렵지만
내 눈앞에 떨어진 새로운 과제들과 맞붙어 싸워가고
에너지를 잃지 않고
새로운 일과 지식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로
나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진땀을 흘려가며 새로운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그렇게 또 다음 단계의 생을 꾸며나가는
마리코씨의 모습이 정말 멋지게 보였습니다.
나도 80세가 되었을 때 저런 모습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고보니, 대학교 1학년 때 김혜자 배우님과 고 김주승 배우님이 출연하신 연극 “19 그리고 80”을 봤을 때, 80세에 생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그때까지의 삶을 마음 가는대로 멋지게 살아보기 위해 노력했던 모드 할머니의 삶이 좋아보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80세에도 웃고 울고 춤추고 노래하며 활기차게 삶을 지속해가는 마리코 할머니의 모습이 더 근사해보이네요. ^___^. 문제는 80세라는 특정한 나이대의 삶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살아가게 될 나날들을 어떻게 꾸며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니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80세 마리코”를 보시고 같이 수다를 떨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하겠습니다. ^__^. 참, 그리고 ‘호기심’과 ‘내 삶을 즐겁게 꾸며나가기’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재미있었던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쓰루타니 가오리 / 북폴리오 / 총 5권 완결)’도 같이 추천드려요.
이 세상에는 내가 미리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지요. 저에게도,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지금까지 익숙하게 해왔던 일을 못하게 될 때가 분명히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예전보다 훨씬 더 길어졌는데, 직장에 다닐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예전과 비슷하거나 더 짧아졌으니까요. 그럴 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거야!”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마리코씨와 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기반으로 또 새로운 삶을 만들어 자신에게 선물해보려는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있다면, 그 때에도 버텨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버틸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격려보다는, 최근에 제가 듣고 울컥했던 노래 가사를 하나 들려드리고 싶어요(사실 일본어 노래라서 귀로는 멜로디를 듣고 눈으로는 번역된 가사를 읽었습니다 ^^a)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누구도 구할 수 없다고.
슬픔 하나도 달랠 수 없다고 (그대는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폼만 잡고 있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서라도
매일 무엇인가에 열중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대는)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 좋다.
내가 있다. 모두가 있다. 그리고 그대가 있다.
그 외에 무엇이 가능한가.”
- 타마키 코지의 “전원” (Tamaki Koji / 田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