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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오찬호 작가님(사회학자) / 심리학관

by 심리학관

한국의 자살률은 1997년 13.2명에서 1998년 18.6명으로 급증하는데, 이건 외환위기의 영향이지만 정확히는 그 위기를 '견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다. 서구사회와 이웃 나라 일본이 자살률이 높아 전전긍긍할 때, 한국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저 한국의 따뜻한 가족문화 타령하기 바빴다. 가족문화가 깨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가족문화를 깨트리는가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전자는 개인의 정신건강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함을, 후자는 고삐 없이 질주하는 자본주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제어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했는가. 이미 어그러진 신호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자살률이 조금씩 오르면서 드러나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IMF 사태가 터졌을 뿐이다.


외환위기는 어떻게 극복되었을까? 당시 한국의 구조조정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IMF가 걱정할 정도였으니, 어떤 상황이었겠는가. 성장 일변도의 접근이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한 이유인데, 한국은 그보다 더 강한 성장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가며 위기를 빠른 시간에 극복했다. 사람들이 쓰러지는 거야 당연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자살률은 가파르게 증가한다.


이 시기 유행어는 '부자 되세요'였고, 서점에서 자기계발서들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가파르게 증가했다. 힘든 게 인생이라는 말이 무슨 철학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유했고 미치지 않고선 성공할 순 없다는 이야기가 교훈이랍시고 넘쳐났다. 성공 아니면 실패 정도가 아니라, 성공 아니면 죽어야 하는 세상이었던 거다.


극기, 인내, 노력만이 진리였던 시기에 누가 '마음이 불안하다'면서 도움을 청하겠는가. 단적인 예로 나는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는 시간강사 생활을 12년간 하면서 병원 진단서를 첨부한 유고결석계를 매 학기 수백 장 받았는데, 단 한 번도 정신과 질환이 적힌 의료기록을 본 적이 없다. 없어서였겠는가? 밝힌들 소용이 없으니, 드러내지 않는 거다.


우울증은 골절하곤 다른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상대의 병을 알면 '어쩌다가?'라는 추임새를 습관적으로 뱉는다.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이 물음은 운동하다가 등등으로 이어져 자연스러운 대화를 보장한다.


하지만 우울증은 끊긴다.

애써 이유를 설명한들

"그것도 병이냐"

"누군 안 힘드냐"

"그러면 대한민국 사람 다 우울증 걸리겠네"

등등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니

아파도 말하지 않는다.


우울증은

극기, 인내, 노력 앞에서

너무나도 납작한 증상이기 때문이다.


OECD 자살률 1위 국가가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회는 움직였다.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은,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국가 차원에서의 관심은 보다 전문적으로 변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강연과 저술로 대중과의 간격을 좁혔다. 그들은 정신건강 돌봄의 중요성을 부단히 강조했고 그 덕에 사람들은 용기 내서 병원을 찾았다. 이 별 거 아닌 게, 그전까지는 '뭘, 그런 걸로 병원을 가냐'는 식의 빈정거림과 마주해야 했으니 엄청난 변화였다.


자기계발에 너무 집착하면 차별과 혐오에 둔감한 괴물이 된다는 논의도 등장했다. 개인의 정신적 아픔을 차분한 논조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책들이 힐링서로 주목받곤 했다. 편견이 조금씩 깨지니,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자살률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 야속하게도 자살률의 흐름은 약간의 굴곡도 있지만 우샹향이다.


왜일까. 두 번째 질문이 풍성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누가 자살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정신건강을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연료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학교에서도 검사가 많다. 치료과정도 체계적이다. 학교 상담사를 만나고, 외부 상담기관을 소개받고, 병원을 가는 결심에 이르는 과정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위기관리 매뉴얼이 작동되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낯설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 몇 단계만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을 다들 이해는 하는데, 그 사회가 구체적으로 언급되면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많은 이들이 '우울증 환자가 늘어났다'는 걸 사회적 설명의 전부로 이해한다. 요인을 찾아가면 표정은 굳어진다.


경쟁, 능력주의, 승자독식,

엘리트주의, 양극화 등의 말들이

끼어들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런 가치를 신봉하고 사는 거야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사회비판 학문이 대학에서 사라지는 걸

찬성하는 거야 자유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언론이 불평등에 예민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워라밸 챙기다가

이도 저도 안 된다고 말하는 거야 자유다.

하지만 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아무리 정신건강 돌봄 매뉴얼이 좋아졌단 한들,

자살위험군 분모가 커지면 감당할 수가 없다.


나는 강연에서 영화 <기생충>을 '한국이 왜 자살공화국인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는데, '세상을 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좋겠다'는 충고를 들었다. 방송에서 초등학생이 의대준비반에 들어가는 시험을 '미쳤다'고 표현했더니,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폄하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두 번째 질문을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어떻게든 막겠다는 세상에서,

자살률은 절대 줄지 않을 거다.


자살을 공중보건 국가비상사태의 영역에서 다룬다는 것은 그 원인과 해결책을 사회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찾겠다는 뜻이다. '사회적 타살'이란 말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그 사회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개인에게 얽혀있는 복잡한 사회적 실타래를 조금도 축소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왜'의 무한반복으로 가능할 거다.

왜 자살하는가?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면 그건 또 왜인가.


이런 접근을 지긋지긋하게 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도대체 어떠한지를 따지고 또 따져야지만

자살률은 유의미한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37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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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률이 걱정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오찬호의 틈새]

오찬호 작가님(사회학자)

2025.03.19.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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