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가 체질 / 박정민의 수다다방 [심리학관]
(스타 PD와 신인 작가가 방송국 편성회의에서,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presentation 진행중)
* 부장1 : 매회 다른 에피소드로 미니를 풀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어요? (잘난척 하는 태도, 건들건들)
* 신인 작가(천우희 배우님) : 매회 시놉시스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미 16부를 가득 채울 에피소드는 준비가 되어 있구요. 재미없으면 갈아 끼울 스페어도 충분합니다. 유의미한 평가를 받게 될 경우, 생각해볼 수 있는 시즌제에 대한 여지도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장2 : 드라마는 모름지기 다음 회가 궁금해야 되는데, 주 5회 20분짜리 시트콤도 아니고. 우리는 주5일을 기다려야 하잖아. 한 회 정도는 안 보고 넘겨도 될 만한 시리즈물. 뭔가 불안하지 않아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가소로워하는 눈빛과 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불신의 고개저음)
* 신인 작가 : 흔한 말로 낛시질이라고 하죠? 시청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고, 당장 다음 신을 기다리게 만드는. 저희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당장의 떡밥이 아닌 감정 이입, 공감, 그리고 바로 캐릭터의 힘입니다. 상황이 아닌,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캐릭터들에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하게 또박또박 설명함)
* 부장3 : 그런 힘이 있을까? 여자들 얘기에 너무 치중된 거 아니야?
* 부장1 : 아이, 그러네. 여자는 힘이 없네. (슬금슬금 무례하고 비생산적이며 쓰잘데없는 유머에 발동을 걸면서, '나는 정말 유머스럽고 재치있는 사람이야' '공적인 자리에서도 이렇게 아무말 대잔치를 할만큼 이 자리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지'라는 착각과 자부심을 뿌려대기 시작함) 작가님 힘 세요?
* 신인 작가 : 저요?
* 부장1 : (헛웃음) 네, 작가님. (턱으로 작가를 가리킴)
* 신인 작가 : 물건들 때 쓰는 그 힘이요?
* 부장들 : (한심하다는 듯이 피식하고 웃음)
* 신인 작가 : 제가 지닌 힘과, 지금 여기 편성 회의와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속으로는 쌍욕을 날리고 싶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전문가로서의 품위와 예의를 갖추려 노력하는 태도)
* 부장2 : 드라마 이거 체력전이에요.
* 신인 작가 : 드라마 작가는 여자가 더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부장1 : (빈정거리며) 아~~~ 작가가 세긴 세지.
저, 힘은 모르겠고 기가 세. 우리 작가님도 보통이 아니겠네. (깔깔 웃으며 '나 정말 재치있는 말을 했지?'라는 얼굴로, 옆에 앉은 남성 동료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모습을 보임)
* 신인 작가 : ('수준 낮은 너랑 싸워서 똑같이 멍청이가 되느니, 그냥 마음이 태평양 처럼 넓은 내가 웃어준다' 라는 마음으로 미소지으며) 네.
한국의 조직과 업무현장에서 여성에게 '기가 세다'는 말은 거의 100% 부정적인 피드백입니다. (생각해보면 남성에게는 '기 세다'라는 표현을 잘 안 씁니다. 성격이 강하다? 좀 센 표현을 쓴다? 파워풀하다? 존재감이 크다? 이런 말을 대신 쓰지요)
여성에게 쓰는 '기 세다'는, 그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더라도, '만만치 않다, 여성답게 부드럽거나 순종적이지 않다,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거칠다, 투박하다'라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 때 사용되는 것 같아요.
동료나 선후배, 이해관계자나 업무파트너가 일을 아무리 잘해도 물론 불만인 부분이 있을 순 있지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방끈이 짧든 길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어느 지방 출신이든, 아파트에 살든 주택에 살든 상관없이 말이지요.
그런데, 유독 상대방이 여성일 경우에는, '기가 세다'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들립니다. 문제해결을 잘해도 "기가 세다(성과는 잘내는데 영~~ 기가 세가지구..)". 여성이 추진력이 좋아도 "기가 세다(일은 빨리 마무리하는 편인데, 기가 세니까 조심하셔야 할 걸요? 여자가 거칠고 투박해가지구요)". 여성이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도 "기가 세다(어유, 이러다보면 또 기 센 OOO님한테 말로 지겠네? 아이고오 무서워라~~~).
이 한마디로 소중한 여성 동료의 역량과 가치를 비하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들리네요. 아쉽고 슬프고 속상합니다.
진짜 여성 동료에게 불편한 게 있으면 '기 세다'라는 말로 뭉뚱그리지 말고, 차라리 그 불편함을 구체적으로 잘 정리해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텐데 말이에요.
새해에는요.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하는 피드백이요.
특히 피드백 문장에 넣는 형용사를 선택할 때요.
그 사람의 젠더(gender)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이루어졌으면 하는
오래된 희망을 다시 한번 새롭게 가져보았습니다.
우리나라건 외국이건 피드백을 할 때
젠더에 따라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으니까요.
조직에서 남성직원에게는
행동과 업무성과에 대한
명확한 피드백을 제공해서
직접적으로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지만,
여성에게는 주로 태도나 성격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
성과를 내기 위한 업무행동지침에 대해서는
오히려 애매하고 모호하게 피드백을 해서
별 도움이 안된다는 연구결과도 있구요.
우리 모두
'붉은 말의 해, 2026년에는
(강점 강화를 위한 피드백)
'문제해결력이 좋아요' '추진력이 강해요'
‘설득력이 좋죠'
-> with 구체적인 상황 & 행동묘사와 함께.
(성장과 변화를 위한 피드백)
'협업해서 과제를 푸는 과정에서,
이런 부분을 수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일을 진행할 때, 주위 사람들과
속도 맞추는 데에 신경을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OOO님의 GGGGGG라는 표현은
주니어들에게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더라구요'
'이런 경우에는 어떤 표현이 더 좋을지
같이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와 같이,
상대방의 성장과,
나와의 건강한 협업을 위한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피드백을
모든 젠더의 동료들에게 많이 해주고,
나자신에게도 피드백 제공을 많이 요청하는
* 스타 PD(안재홍 배우님) :
부장님, 드라마 얘기 하시죠.
* 부장1 : 응? 하잖아. 아니 뭐, 어? 뭐, 뭐, 뭐. 여자만 나와. 왕자님 없어? (2019년 드라마였습니다)
* 부장2 : 거기다 좀 투박해. 누가 투박한 여자 좋아해요? (2019년 드라마였습니다)
* 신인 작가 : 인물들이 투박하다는 건가요? 글이 투박하다는 건가요?
* 부장3 : 으음, 질문은 우리가 하지요. 여기 질문에 질문으로 답할 수 있는 자리 아닌데? 그러니까 기세다는 말을 하는 거에요오~~ (???????? / 나는 언제든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지만, 너는 인형 같이 앉아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돼. 그런데 네가 말을 한다는 건, 싸가지 없다는 의미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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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코치의 수다다방 : 피드백을 구체적으로 주는 것을 정말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단어에 대해 양쪽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직도, 높으신 분들은 부하직원에게 애매모호하게 구름위에 떠다니는, 쌀로 밥을 짓는 이야기를 하시고, 직원들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머리를 싸매고 그 형태없는 말을 해석해보려 애쓴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립니다.
아무리 좋은 피드백도, 피드백 받는 사람이 이해하고 소화해서 자신의 행동으로 실천해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기세다'라는 무례한 말을 한마디 던져서 '상대방의 기를 죽이고 말겠어!' 라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보다는, 지금 상황에서는 각자 어떤 역할을 맡고 있어야 하는지, 상대방이 특정 행동을 하는 것이 어떻게 느껴져서 회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지,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성과산출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피드백을 주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라고 보여집니다. 그것이 진정한 상사와 선배, 멘토와 코치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꽈.)
* 부장1 : 유연해야지. 신인이잖아. (경험도 없고 경력도 없는 초짜면, 납짝 엎드려서 기어야지. 어떻게 그렇게 턱을 탁 치켜들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려운줄도 모르고 따박따박 하는 거야? 그렇게 뻣뻣해서 어디다 쓰겠어? -> 사실 유연한 태도를 원하는 게 아니라, 겸손하고 공손하게 내 말 잘 들으라는 이야긴 거죠)
* 부장2 : 혼자 다 이끌어갈 수가 없다고오~
* 부장3 : 드라마 쉬운거 아니에요오~
* 스타 PD : 신인이 왜 유연해야 합니까? 그럼, 뭐 기성은 뻣뻣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그 뻔한 스토리 뽑아 내는 비결이 뻣뻣함이었습니까?
도대체 왜 이 자리에서
여자 힘센 얘기,
작가 기센 얘기가 이렇게 나오는 거죠?
부장님은 뭐, 힘이 없어서 부장님 하고 계신 건가요? 아, 그래서 야유회 가며는, 아이스박스 하나 안 들고, 뭐 그늘밑에 앉아 가지고 썰어 드리는 수박 냠냠 하고 드셨던 겁니까?
뭐, 힘없는 거 부러워하라는 겁니까, 뭡니까, 예? 도대체 왜 이 신성한 편성 회의 자리에서, 이런 시대착오적인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난무하는 거죠, 예?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 채널이라면 저도 여기서 임진주 작가님께 같이 작품 하자고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 손범수에요. 지난 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이 채널에서 원하는 시청률 제가 다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게 이런 모멸감이라니요. 좋습니다. 여기 계신 부장님 스타일로 제가 한번 얘기를 해 볼께요.
생맥주를 앉은 자리에서 12잔을 원샷을 때리고, 술은 소맥이라면서 그때부터 말아 먹기 시작해요. 생맥 12잔이 warm-up이었던 거에요. 그 사이에 안주는 또 얼마나 많이 먹었는 줄 알아요? 여기 계신 부장님들은 감히 하루 내에 소화시킬 수 있는 양이 아니었어!
눈 밑에 뭐, 다크서클이요? 보통은 까맣죠? 아니요, 보세요! 눈 밑에 어리굴젓이 있어요! 이렇게 고생해요. 뭐, 기가 세냐구요? 예, 맞습니다. 제가 작가님 대본 열심히 까고 있으면, 저 멀리 어디에선가 막, '개새끼야, 소새끼야' 하는 소리가 들려요. '어, 뭐지? 뭐야, 어디서 나는 소리야?' '둘밖에 없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지?' '뭐야, 이거? 아빠야?' '아, 이거 인터스텔라야?' '뭐야, 어디서 나는 소리야?'하고 보면, 작가님의 마음의 소리였어요. 마음으로 하는 소리가 슉슉슉슉, 귀로 들립니다. 그런데 뭐요, 뭐 잘못됐어요? 왜 그러시는 건데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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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가 체질> 5화.
* 연출 : 이병헌, 김혜영
* 극본 : 이병헌, 김영영
* 방영 : 2019년
* OTT : 티빙 / 넷플릭스 / 웨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