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 심리학관
그동안은 거짓말이 기본값이었다. "저희끼리 보육원을 나오기 전에 고아인 것을 밝힐지 안 밝힐지 얘기를 진짜 많이 했거든요. 또 선배들 경험담을 듣고서 '(고아라는 걸) 말했을 때 이러이러하대, 안 말했을 때 이러이러하대'라는 데이터가 구전처럼 내려와요. 그게 쌓인 거죠.
회사에서도 말하면 안 되고 거짓말을 해야 되고, 애인이 생기거나 결혼을 할 때도 얘기를 안 하는 게 좋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금기시했어요. 또 시설을 나왔을 때 사람들의 편견이 살짝살짝 드러나니까 더 강화되었죠. 맞네, 말 안 하기 잘했다"
사례는 셀 수 없다. 피해를 본 운전자가 상대에게 '못 배운 고아 새끼도 아니고'라는 말하는 걸 들었다. 단순히 기분차원이 아니라 생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자영이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고용주가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했고, 부모가 없어서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통보한 적도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을 때 당하는 불이익이 거짓말을 하는 불편함에 길들여지도록 한 것이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며 그의 목표가 바뀌었다. 자립준비청년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삶에서 자립준비청년이 손자영의 전부는 아닌 삶으로. 시민단체 컴페이너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입사했을 때 동료들은 그의 성장 배경에 대해 "흥미로웠다"라며 관심을 보였다.
한 상급자는 좀 지독했다. 한번은 술에 취해서 자영에게 물었다. 자기소개서를 읽었을 때 결핍이 많아 보였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협업하는 외부 사람들도 있는 자리였다.
자립준비청년이라는 정체성은 손자영이 하는 일거수일투족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사람들은 어느 땐 치열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멘탈이 튼튼한 것 같다며 난 놈이라고 했다가, 어느 때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길래 어디서나 그렇게 잘 어울리냐며 결핍이 있어서 치열한 거 같다고 말했다.
결혼이 성사되지 않아 속을 끓이던 상급자는 급기야 그의 면전에서 말했다. "난 차라리 여자친구가 고아면 편할 것 같아"라고. 그것도 꽤 여러 번. 어떻게든 1년은 버텨야 경력이 쌓인다는 사실 하나 붙들도 안 들리는 척 참아온 자영은 어느 날 '툭'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길로 퇴사를 통보했다.
상급자가 마음에 걸렸는지 따로 불러서 혹시 자기 때문에 그만두는 거냐고 물어봤을 때, 자영은 "그래, X발 새끼야. 너 때문이다"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가 회사 위치도 다니기 편하고 월급이나 복지가 좋았어요. 근데 나는 자립준비청년 말고 일하는 나로서 봐주지 않는 이상, 돈이나 복지가 커도 더는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를 느꼈어요." 바라는 건 그거죠. 나를 제발 이렇게 봤다 저렇게 봤다 하지 마라.
"어딜 가든 따라다니더라고요.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이십 대보다 조금씩 나아지거든요. 방법들도 생기고요. 예전에는 거짓말을 하는 다양한 방법이었다면, 요새는 상대방이 당황하지 않게 어떻게 유쾌하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해요.
지난번 회사에서 느꼈잖아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상대가 어떤 때는 이렇게 보고, 어떤 때는 저렇게 본다. 나는 그냥 말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그 사람 몫이겠다. 그래서 말을 했죠. 제가 부모님이 안 계신데 그건 다음에 얘기해줄께요. 궁금하면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서 얘기를 하자구요.
매장에서 정신없이 바쁠 때 동료들이 하는 농담이 있다. '엄마 보고 싶다' '나도 엄마 있는데' 그건 집에 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날도 무심하게 한 동료가 "엄마 보고 싶다" 이러더니 "아!...."하고 말끝을 흐렸다.
자영은 가볍게 응수했다. "엄마 보고 싶을 수 있죠. 근데 난 신데렐라라서~." 어느새 맷집이 생겼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피해자이고 나만 너무 외롭다고 설움에 복받쳐 무슨 말만 들으면 또르르 눈물부터 흘렸던 이십대를 살아낸 자영은 이제는 남들도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산다는 것을 안다.
"스타벅스에서 일할 때 보면 할아버지들 할머니들이 그냥 혼자 맨날 와요. 작은 사이즈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가만히 사람들을 구경해요. 책 보는 것도 아니고 진짜 그냥 있어요. 그걸 보면서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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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신데렐라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손자영은 보육원에서 자란 자립준비청년이다.
이른바 '고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널리 알려왔다.
그는 자립준비청년임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 은유 작가님 / 은유의 '자립 해봤어?'
* 시사IN : 2026.02.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