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균의 아이러니
2부 What’s Lost 가공과정에서 사라진 영양
4장. 열과 시간의 대가 _가공기술이 빼앗은 영양소 (3)
우유는 본래 '살아 있는' 식품이다. 갓 짠 생우유(raw milk)는 효소, 유산균, 면역 단백질, 성장인자 등 살아있는 생명 구성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선한 우유의 생명력이다. 그러나 동시에 쉽게 상하고 세균에 취약하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는 [살균(pasteurization)]이라는 기술을 개발했다. 19세기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박사가 낮은 온도로 일정 시간 가열하면 병원균은 죽이고 영양은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로써 우유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 식품’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 유통 환경은 더 혹독하다. 냉장 운반이 어려운 지역이나 장기 보관을 위해 산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바로 [멸균(sterilization)]이다. 130~150℃의 고온에서 2~3초간 순간적으로 가열한 후 무균 포장하는 방식으로, 상온에서도 수개월 보관이 가능하다. 우리가 편의점에서 흔히 보는 멸균우유(UHT 우유)가 바로 그 결과다.
멸균은 안전과 유통성을 높여줬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비타민 B군과 C, 면역 관련 효소, 유익한 젖산균은 열에 약해 거의 사라진다. 단백질 구조도 변형되어 흡수율이 떨어지고, 우유 본연의 신선한 향과 맛도 함께 희미해진다. 대신, 가열 과정에서 생긴 갈색빛과 가열취(heat flavor)가 남는다.
결국 이 기술은 우유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영양과 풍미를 희생한 셈이다. 냉장과 시간의 제약을 이긴 대가로, 우리는 살아 있는 음식이 아니라 오래가는 음식을 얻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멸균우유가 더 진하고 고소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는 신선함이 아니라 가열로 인한 단백질 변성과 마이야르 반응의 결과다. 우유가 진하게 느껴질수록 오히려 ‘가열된 맛’에 익숙해진 것일 수 있다.
더구나 영양 손실을 보완하기 위해 일부 제품은 비타민을 인위적으로 첨가하지만, 자연 상태의 효소와 미네랄 조화는 되살릴 수 없다.
우유는 ‘죽지 않기 위해 죽이는 기술’의 상징이다.
멸균은 인류에게 안전을 주었지만, 동시에 음식의 생명력을 빼앗았다.
편리함은 늘 대가를 요구한다.
식품의 수명을 늘리는 기술은 결국 우리의 건강기한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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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Luci's Lab의 <食解, 가공식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 시리즈의 일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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