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아방가르드(3)

절대주의, 미니멀리즘의 효시

by 크리스
optimize 말레비치 <절대주의>(1915)


-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는 칸딘스키 못지 않게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 이번 전시에 소개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1915) 앞에서 도슨트는 관람객들에게 "이 작품을 '영접'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해야 한다"며 작가에 대한 경외심을 숨기지 않았음.


- 말레비치의 대표작인 <검은 사각형>(1915)은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이 그려진,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예술계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됨. 혹자는 마르쉘 뒤샹(1887-1968)의 <샘>(1917)에 버금 가는 충격을 준 작품이라고 보기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말레비치는 세계의 가장 기초이며 근원이 되는 원형 原形에 천착했고, 그 결과 단순해 보이는 도형에서 세계의 모든 형상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됨. 요컨대 검은 사각형을 돌리면 원에 나누고, 겹치면 삼각형과 직사각형 등 모든 도형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


2014022103900_0.jpg <검은 사각형>(1915)


- 그가 주창한 '절대주의', 쉬프레마티슴Suprematisme은 선과 색만으로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는 기하학적 추상을 구현해 내려는 시대를 앞선 시도로, 대상에 어쩔 수 없이 갇히게 되는 회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의 일환에서 탄생. 말레비치는 1915년 <0.10 전시> 이전까지는 인상주의를 그리던 화가였는데, 당시 유행하던 예술 기법이던 큐비즘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기존 회화의 한계를 느끼고 이를 신지학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감행, 과감한 도약을 실천한 결과가 바로 이 절대주의.


NSC20161122_122058_edit_edit.jpg?type=w2 0.10 전시(1915)

- 신지학(theosophy)이란, 신비주의적인 철학 체계로, 모든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예술을 가로지르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진리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 즉, 말레비치는 그리려는 대상을 넘어선 어떤 근원을 회화로서 구현하려고 했던 것. 그래서 말레비치는 "대상을 대상으로서 그리려는 건 원시인이 동굴벽화 그리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대상의 재현)을 절대주의를 통해 벗겨주겠다"고 선언.


- 회화는 실제론 '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발라 만든 어떤 형상'인데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와 같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 즉 물감이 만들어낸 환영(幻影)만을 보게 됨. 말레비치는 이처럼 눈속임을 목표로 했던 기존 회화로부터 벗어나, 아무런 내용과 의도가 없이 순수한 제로 상태의 회화를 추구. 일부에서는 도형만 덩그러니 놓여진 그의 작품에는 위계질서, 즉 상하좌우의 구별과 방향의 옳고그름이 없다는 점,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빼어나게 잘 그릴 수 없다는 점에서 혁명 직전, 만인의 평등이라는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러시아의 분위기를 엿보기도.


- 스탈린 집권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 탄압에 칸딘스키를 포함한 많은 러시아 화가들이 유럽으로 망명했지만, 말레비치는 모스크바에 남아 미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함. 하지만 '퇴폐 미술가'라는 낙인으로 인해 그는 1935년 눈을 감을 때까지 풍경화와 정물화 같은 그림만 그려야 했는데, 1930년 고향 키이우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곧바로 폐쇄되었고 이를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어 두 달의 형을 살기도 함. 하지만 암으로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신의 관뚜껑에 검은 사각형과 원을 그려넣어 만들었을 정도로 '절대주의'에 대한 끈은 놓지 않았음.


- 그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사후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기하학적 추상이 만개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고,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여러 예술가들이 1960년대에 이르러 '미니멀리즘'이란 장르를 개척하게 됨. 말하자면 그와 그가 내놓은 절대주의가 현대 산업디자인을 주름잡는 미니멀리즘의 효시인 셈.


- 한편, 말레비치는 '러시아에서 가장 비싼 화가'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음. 아래 <절대주의 구성 회화>(1916)는 2008년 뉴욕 소더비에서 6000만달러에 팔려 당시 러시아 역사상 가장 비싼 미술품 가격을 기록했으며, 이후 2018년 다시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8580만 달러에 판매돼 스스로의 기록을 경신함.

604533_506300_3113.jpg *절대주의 구성 회화(1916)*
매거진의 이전글러시아 아방가르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