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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t Festival Aug 01. 2016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고양이는 꽃이 되었다(1)


생명이 존귀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생명은 존엄하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생명이 똑같이 존엄한가?

는 또 다른 문제이다)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하여 왜?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필자는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 라고 말하겠다.

우주에 나 혼자 존재한다면, 그 어떤 다른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엄한가. 존귀한가.

 아니다. 나는, 나라는 존재는 무의미하다. 존재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나 이외에는 심지어 나 스스로에게 조차 큰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홀로족. 혼밥족. 이런 말들은 마치 현대인은 이제 관계에 지쳤다고 말하는 듯 하다.

우리 스스로도 그렇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가 지친 것은 관계 그 자체가 아니다. 즐겁지 않은 관계에 지친 것이다. 풀어 말하면 내가 맞춰 주어야 하는 소모적 관계에 지친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내보일수 없는 관계. 나를 평가하고 잣대를 들이대는 관계에 지친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원한다.

그것이 우리를 존귀한 존재로 만든다.

관계를 위해서는 둘 이상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 날 인간 관계에서 즐거운 관계로 가기까지는 험난하기만 하다.


어떤 이는 이기적이다.

어떤 이는 오지랖이 넓다.

어떤 이는 눈치가 없다.

어떤 이는 말이 안통한다.

어떤 이는 구두쇠다.

어떤 이는 나를 이용하려 하고

어떤 이는 너무 잘났으며

어떤 이는 너무 못났다.

그 어떤 이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매일 부대끼며 살아간다


마음은 지쳐간다.

맞춰주는 것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그렇다면


당신도 고양이를 만날 시간이다.


고양이는 인간과 대등한 관계를 원한다. 그래서 고양이는 지친 인간관계의 도피처가 아니다. 힐링을 주는 작은 쉼표이다.




고양이와의 동거는 묘하게도 연애와 닮아있다.

언제 시작된지 모르게 정신을 차려보니

시작되어 있고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며

처음에는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서로 익숙해지고

결국 같은 공간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지만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존재를 각인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관계가 된다.



두 생명체가 한 공간에서 시작하는 이 동거는

 고양이의 이름을 짓는 일에서 유의미하게 시작된다. 

내가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 부르기 시작할 때

고양이는 천천히 관계의 첫걸음을 뗀다.





(필자는 그 옛날 할아버지께서 보여주신

"막내니까 말자"수준의

날치기 작명 마인드로

"순하니까 순디 "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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