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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Oct 24. 2019

영화 <조커> -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신작영화리뷰, 리뷰와 해석

*스포 있음


<조커>

2010년 4월 말, 천안함 사태가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를 타고 집을 향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택시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천안함의 범인을 두고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사가 말을 걸었다. “학생은 천안함, 이거 북한이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물쩡거리며 답했다. “뭐… 북한이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기사가 다시 말했다. “나는 북한이 해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미군이 실수를 했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엄청 큰 문제고… 북한이 했다 해도 우리 바다에 몰래 들어와 어뢰까지 쏘는 데 그걸 감지하지 못했다는 건 말도 안 되게 큰 문제죠” 지당하신 말씀이다. 나는 조용히 공감을 표하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직후, 기사는 내 평생 기억에 남을 대사를 읊었다. “나는요, 이게 북한이 한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주 전쟁이 터져버렸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어안이 벙벙했다. 전쟁이 터졌으면 좋겠다니? “물론 전쟁이 나면 좋지야 않겠죠. 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나 같은 사람들은, 아주 그냥 전쟁이 나서 세상이 뒤집어져 버렸으면… 아주 박살이 나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고요”


벌써 9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대화의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후 9년도, 그 이후의 9년도 이 대화는 잊히지 않을 거다. 그런데 이거 영화 <조커> 리뷰 아니냐고? 갑자기 무슨 천안함이냐고? 아주 뜬금없는 맥락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 대화가 영화 <조커>의 주제와 크게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커>의 구조... 조커 이야기가 아서 플렉의 망상인 이유

이 영화의 주제를 논하기에 앞서 이야기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나는 조커의 존재가 정신병자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망상(엄밀히 말하면 망상과 현실의 혼합)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망상이었을 때만이 비로소 이 영화가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꾸준히 아서 플렉이 망상증 환자임을 보여준다. 자기 코미디에 웃어주는 관객들, 여자친구의 존재, 그 모든 것이 현실 위에서 아서가 꾸민 망상이다. 문제는 영화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망상, 즉 ‘조커 각성’ 역시 망상 인가 하는 부분이다. 나는 망상이라고 본다. 힌트는 정신병원이다. 영화 속 정신병원 퍼즐은 하나하나가 모두 어긋난다.


영화 시작 부분 상담사와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아서 플렉은 정신병원에 입원(수감)했던 경험을 말하며 입원 이유에 대해 “Who knows(누가 알겠어요)”라고 답한다. 즉, 아서 본인에 따르면 그는 과거 정신병원에 수감됐던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가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는 분기점, 엄마 페니 플렉(프란시스 콘로이)이 망상증 환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씬을 보자. 페니의 진료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아캄 정신병원에 들어선 아서는 마치 그 병원을 처음 들어가 보는 사람인양 행동한다. 직원에게 여기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입원하느냐고 물어보고, 직원 역시 아무 문제없이 그의 요청을 받아 자료를 찾는다. 이는 아서 플렉이 사실 아캄 정신병원에 수용된 적이 없음을 보여주는 씬이다.

자,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씬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퍼즐이 어긋난다. 아서는 정신병원에서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확실한 정신병원 입원 환자다. 아서는 뭔가 상상한 뒤 낄낄 웃는다. 아서의 웃음은 폭력 시위대에 의해 파괴된 고담시, 그들에게 갈채받는 조커 본인, 그리고 토마스 웨인 부부의 죽음과 연결된다. 상담사는 묻는다. 뭐가 그리 웃기느냐고. 아서는 답한다. "조크가 생각났어요" 상담사가 그 조크 내용을 들려달라고 하자 아서는 정색하며 답한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 파트에서 아서의 머리 색은 초록이 아닌 갈색이다. 초록 머리는 조커의 상징이다. 이미 조커가 된 그의 머리색은 초록이어야 하며 결코 아서의 갈색 머리가 돼서는 안 된다. 아서의 갈색 머리, 그리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현실은 아서가 조크를 떠올리며 킬킬대는 연출과 맞물려 조커의 존재와 이야기가 망상임을 나타낸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망상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뿐이다.


<조커>의 주제... "어차피 너희는 이해하지 못해"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서 플렉의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의 주제를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조커는 누구인가? 그는 미국 도시 하층민의 예수다. 이때의 하층민이란 그야말로 도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하층민이다. 만원 이상의 돈을 선뜻 지불하고 푹신한 영화관 소파에 앉아 영화를 즐길 여유가 있는 그 모든 관객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의 삶과 존재는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 <조커> 관객들에게 있어 그 현실은 텍스트나 모니터 속에만 존재하는 머나먼 현실이며, 결코 가깝지 않은 그 현실은 망상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서 플렉이 사회 밑바닥의 하층민을 대표한다면,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그를 재단하는 정신병원의 상담사는 바로 우리, 관객들이다.

모든 것이 망상이었을 때 이 영화는 비로소 완성된다. 하층민의 반란은 그 자체로 망상이다. 그들은 가끔 세상이 뒤집어져 버렸으면, 무너져 버렸으면 하고 혼자 꿈꾸고 망상하며 킬킬 웃기도 한다. 기존 시스템과 질서가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들은 시스템의 붕괴와 무질서를 소망한다. 완전히 뒤집어지고 무너진 사회 위에서, 그야말로 ‘평등한 기회’ 위에서 새로운 시작을 남몰래 꿈꿔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영화 <조커>를 영화관에서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우리 관객들이 보기에 그들의 사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고 끔찍하며 무지한 것이다. 이를 망상하는 현실의 하층민 역시 막상 이를 실현할 용기와 능력은 없다. 그래서 ‘조커’가 등장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정의를 세우는 망상은 자신만의 조용하고 웃긴 ‘조크’로 남는다. 그들이 홀로 낄낄 웃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묻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나한테도 좀 들려줘” 아서 플렉은 그런 우리에게 답하는 것이다. “말해봐야 이해하지 못할 거야. 객석에 앉은 너네는 감히 우리 삶을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라고.


위험한 작품... 감독의 조커 연출 방식

문제작임은 틀림없다. 위험한 영화다. 다분히 선동적이지만 동시에 논리적이다. 평생 피해자로 살아온 사회적 약자였던 아서의 살인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자아 붕괴 역시 공감할 만하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오랜 꿈이었던 코미디를 시작하고 여자 친구를 사귀는)에 가장 큰 비극의 시작(토마스 웨인이 자기 아버지라는)을 마주하게 되며, 그나마도 잠깐 스쳐 지나갔던 자신의 행복이 병적 망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자기 코미디에 웃어주던 관객들, 여자 친구의 존재, 평생 지켜온 어머니, 그 모든 존재가 거짓이다. 이러한 논리적 선동성은 관객들이 악당의 성장에 공감하고 그가 만드는 잔혹한 살인과 무질서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미국이 이 영화의 개봉을 염려할만하지 않은가? <조커> 개봉에 맞춰 경찰이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일부 극장에서는 입장객 제한까지 뒀다는 뉴스는 우리에겐 단순 해프닝처럼 들리지만, 저들에겐 비극적 코미디다.

감독이 조커를 표현하는 방식 역시 조커를 아서 플렉의 '구원'으로 비추는 연출을 이어가는 측면이 있다. 대표적으로 2가지만 보자. 먼저 계단을 이용한 상하 구도다. 봉준호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쓰는 계단 연출을 <조커>의 감독 토드 필립스 역시 사용했다. 아서 플렉은 하늘 끝까지 이어진 것만 같은 높은 계단을 묵묵히 오르기만 하는 반면, 조커는 자유롭게 춤을 추며 그 계단을 끝없이 내려간다.

두 번째는 어둠에서 빛을 향하는 연출이다. 아서 플렉 속의 조커가 서서히 눈을 뜰 때마다, 아서는 빛을 향해 나아간다. 유아 병동에 총을 소지하고 방문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을 때, 아서는 처음으로 상대에게 대놓고 화를 내고 기물을 때려 부숴 망가뜨리며 자신의 기분을 표출한다. 조커가 처음 꿈틀거린 순간이다. 그 후 회사 계단을 춤추듯 뛰어 ‘내려’ 가며 윗 벽에 쓰여 있는 'Don’t forget to smile(웃음을 잊지 말라)'에서 'Don’t'을 지우고 문을 박차고 밖을 나갈 때, 문밖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어머니를 죽이고 비로소 진짜 조커로 각성했을 때 역시 병원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따뜻하게 그를 감싼다. 각성 이후 토크쇼 진행자를 쏘아 죽이고 그를 지지하는 폭력단들에 의해 자동차 위에서 추대될 때는 또 어떤가? 모든 라이트가 그를 향하며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바라본다. 이때 조커의 자세도 의미심장하다. 십자 자세로 서 군중을 내려다보는 그의 포즈는 분명히 예수의 그것이다.


모든 것이 그저 Joke

이 영화는 2시간 분량으로 잘 짜인 하나의 '조크(농담)'다. 감독은 쿠키영상 같은 느낌의 결말을 통해 '조크'를 확인시킨다. 복도에서 추격전을 펼치고 'The End'가 나오는 영화 결말 씬은 코미디 무성 영화의 제왕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코믹한 결말을 보고도 긴가민가하던 관객들은 크레딧이 올라가며 '감독 - 토드 필립스'가 처음 뜨는 순간 비로소 무릎을 탁 친다. 아, 이 영화 토드 필립스 작품이지. 그렇구나. 거대한 조크였구나,라고 낄낄대며 극장을 나서는 것이다.

토드 필립스(좌)와 호아킨 필립스


★★★★☆





p.s) 개인적으로 역대 최고의 조커였다고 생각한다. <다크나이트>의 히스 레저와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들고 나온 모습은 마치 히스 레저의 조커와 정면대결을 신청한 느낌이었다.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이 대결에 호아킨 피닉스의 판정승을 선언하고 싶다. 영화 한 편을 온전히 혼자 힘으로 끌고 간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력에는 경외심이 들 정도다.

JOKERS


p.s2)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씬 중 하나는 바로 이 장면... 웃는 포인트가 다른 아서 플렉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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