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트롱 Jun 20. 2021

<신 고질라> - 괴수물 탈을 쓴 정치 블랙코미디

에반게리온 감독이 만든 고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 감독이 연출한 고질라

2016년작 일본 본토 고질라. 2004년 <고지라 파이널워즈> 이후 12년만에 미국 헐리우드에서 일본으로 복귀한 고질라 시리즈 신작이다. 감독은 안노 히데아키다(히구치 신지 공동감독). 원래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평생의 걸작 하나가 무척 유명하다.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안노는 1995년 에반게리온의 대성공 이후 히트작을 하나도 배출하지 못했다. 재기를 위해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을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2012년 시리즈 3부 <에반게리온 : Q> 개봉 이후 8년째 마지막 4부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 작품 갑'으로 남는가 했던 안노 히데아키는 2016년 <신 고질라>로 에반게리온 TV 시리즈 이후 약 21년만에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신 고질라>는 2017년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이다. 경쟁작은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위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였다.


안노 히데아키(우)와 평생의 역작 <신세기 에반게리온> (좌)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인 이미지의 New 고질라

<신 고질라>의 고질라는 1954년 최초의 <고지라> 이후 역대 가장 끔찍하고 공포스럽게 생긴 고질라다. 그런데 한국인, 아니, 일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이 영화의 고질라를 보고 혐오나 공포와는 다른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기괴함과 촌스러움이다. <신 고질라>를 본 여러분들은 아마도 "아니, 2016년에 CG가 저게 뭐야? 일본 영화 진짜 망했구나" 싶을 것이다. 고질라의 움직임은 인형극을 보는 듯 부자연스럽고 정적이다. 마치 만들다 만 CG같다.


이는 사실 감독의 노림수라고 한다. <신 고질라>의 고질라는 100% 풀 CG다. 다만 일본 내에서 "아니~ 그래도 고지라는 역시 '특촬물' 전통을 따라야지~ 인형 고지라가 진짜 고지라인 법이여~" 하는 (꼰)요구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100% CG라는 현대식 촬영 방식을 가져가되, 고질라의 질감을 인형처럼 표현함으로써 조화를 꾀한 것이라고. "와 역시 일본 답다! 개꼰대 씹노답 재팬!" 하고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류 반발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다. 2002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에서 요다가 처음 CG로 등장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 요다는 평생 인형이어야만 한다는 전 세계 꼰대들이 들고 일어나 난리난리를 쳤다. 신구의 조화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이는 이 영화 주요 메시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형 시절의 요다(좌)와 CG가 된 요다(우)


괴수물+재난물+정치 풍자 블랙코미디

<신 고질라>는 단순 괴수물이 아니다. 괴수물의 탈을 쓴 재난물이며, 정치 풍자 블랙코미디다. 고질라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재해를 상징한다. 최신식 무기도, 심지어 '지구방위대'라는 미군마저도 고질라를 막을 수는 없다. 66년간 이어진 수 십 편의 고질라 시리즈에서 고질라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 적은 단 한 번이다. 최초의 고질라 시리즈인 <고지라(1954)>에서만 가능했다. 그마저도 퇴치하지는 못하고 다시금 잠에 들게 했을 뿐이다. 이후의 고질라 시리즈들에서 고질라의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라이벌 격 상대 괴수들과 싸웠다. 그러니까 고질라란 애초부터 인간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 분노한 자연 그 자체다. 고질라의 영어 이름이 'Godzilla'인 이유다.


2011년에 동일본대지진이 있었다. 세계가 놀란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었다. 대지진이 몰고 온 쓰나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으켰다. 일본에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생겼다. 지진 이후 일본 사회는 아주 깊은 부분에서 큰 요동이 있었다. 한국이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사회 깊은 곳 어느 지점이 달라진 것과 같다. 하지만 세월호는 인재였던 반면 지진은 자연재해다. 앞으로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자연을 정복할 정도의 기술이 발전하지 않는 한, 일정 규모의 피해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것인가? 피할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똑같이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 또다시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에 인간은, 그리고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2016년에 다시금 고질라를 데려와 내세운 <신고질라>는 이러한 '대지진 이후 변해버린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나아가기 위해 타파해야 할 것들, 타파하기 위해 해야 할 것들

역대 최초로 '고질라'가 주인공이 아닌 고질라 시리즈다. <신 고질라>의 주역은 고질라가 아닌, 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정부 엘리트들이다. 영화의 무게 중심 역시 고질라의 파괴 행위에 있지 않다. 저 무지막지한 괴수를 어떻게 해야 처리할 수 있을 지 탐구하고 고민하는 과정에 실려있다. 영화 내 고질라가 등장하는 씬은 그리 많지 않다. <신 고질라>에서 고질라는 그저 불가피한 사건의 덩어리를 나타내는 기표일 뿐이다. 영화는 고질라라는 상징을 매개로 일본 관료제 시스템, 집단 내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 그리고 정치인들의 속성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회의를 열기 위해 무의미한 회의를 갖고, 젊은 관료들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도리어 눈을 부라리며, '정부는 위기에 대처하고 있어요'라는 정치적 구색을 위해 단체로 빳빳한 새 파란 잠바(우리나라로 치면 노란 잠바)를 꺼내 입는다. 형식을 목적인 양 목을 매는 관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해 실소를 띄게 한다.


하지만 <신 고질라>는 그런 웃긴 꼴들을 보며 같이 웃자고 만든 아담 맥케이 류 영화가 아니다. 영화 속 풍자와 비판은 초반 30여분간 틈틈히 배경으로서 보여질 뿐이다. 감독은 이 현실적인 판타지 영화를 통해 현실 속에 실재하는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제안하려 한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기존 시스템을 탄탄하게 유지 보수하되 구성원을 성공적으로 세대교체 시키는 것이다. 얼핏 <신 고질라>는 관료주의 행정을 조롱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면에서 지금의 일본을 일군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엿보인다. 긴급 사태에서도 영화 속 일본 정부와 내각은 매뉴얼을 철저히 지킨다. 특이사항 발생 직후 곧바로 관료회의를 개최한다. 지난한 회의 과정에서 괴현상의 정체가 괴생명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곧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다. 일련의 과정은 민첩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물론 그 이후 민첩성은 줄어들고 체계는 과도해진다. 회의를 개최할 것인지 결정하는 회의를 2차, 3차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 반복하는 모습, 그리고 대국민 발표를 앞두고 '잘 모르겠다'는 전문가들을 불러 구색을 위한 확인 절차를 굳이 갖는 모습 등은 실소가 터져 나오는 블랙코미디다. 그러나 이 진지한 코미디를 꼼꼼히 지켜온 덕분에 지금의 일본이 있는 것이다. 영화 속 고위 관료는 이러한 비합리성을 불평하는 후배에게 "번거로운 듯 보이지만 관료제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며 다독인다. 실제로 온갖 자연재해가 덮쳐오는 저주받은 땅 위에서 일본 정부는 여지껏 이 관료제 시스템을 이용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 '고질라 사건' 때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 역시 사실은 '지금까지 경험적으로 충분히 합리적이었던' 아주 적절한 대처였을 지도 모른다. 다만 이 재앙의 레벨이 상상력의 한도를 아득히 넘어서는 종류였을 뿐이다.

충격적인 비주얼의 1단계 고질라


히데아키가 본격적으로 경계하는 부분이 바로 이 '상상력'이다. 일본의 구세대 실용주의 관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기록이 있는 것만 사실로서 인지한다. 본인 경험과 상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은 '있을 수 없는 일', 즉, 판타지다. 이 현실적인 관료들은 겪어보지 않은 판타지에 대처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젊은 관료들은 다르다. 그들은 애초부터 "거대 생명체일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상상력의 허용 범위가 다른 것이다. 상상력의 범주는 위기상황 예방과 대처 능력을 결정한다. 만일 처음부터 '거대 생명체일 가능성'을 충분히 허용하고 그에 맞춰 반 발자국만 빠른 고민을 했다면 어땠을까? 강한 쓰나미가 몰아쳤을 때 원전이 붕괴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허용했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구세대의 꽉 막힌 상상력에 그 죄를 묻는다.



그렇다고 구세대를 모조리 쫓아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히데아키가 바라는 궁극의 해결책은 신구 조화다. 옛 것이 마냥 나쁜 것일 수는 없고, 새로운 것이 마냥 좋은 것일 리도 없다. 젊음은 젊음이 잘할 수 있는 일을, 경륜은 경륜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분담해 맡자는 것이다. 젊음은 액션을, 경륜은 경험이 쌓여야만 해낼 수 있는 베테랑의 일을 맡는다. 고질라에게 속수무책으로 도쿄를 내주던 일본은 신세대와 구세대가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나눈 이후에서야 고질라 퇴치 해답을 찾고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말은 아름답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 법해 보이지는 않는다. 구세대가 신세대에게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나눠줘야 하기 때문이다. 히데아키 역시 이 일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판타지'를 이용했다. 고질라가 레이저 빔으로 총리와 대다수 주요 관료들을 일거에 불태워 버리는 극단적인 퇴장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3단계 고질라는 꽤 멋지다


이렇게나 가깝지만 이토록 다른 나라란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혹은 위 내용을 읽으면서) 조금의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는지? 고질라의 형상 말고, 내용에서 말이다. 어쩌면 이 이질감이야말로 한국과 일본의 본질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시민'이 역할을 갖지 않는다. 일반적인 한국, 헐리우드 재난 영화였다면 고질라를 물리치는 데에 평범한 소시민의 힘이 주효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 고질라>에서 시민은 피해 군중으로서 등장할 뿐, 문제 해결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건 정부와 젊은 엘리트들이다. 소위 '아웃사이더'로 일컬어지는 괴짜들이 우수수 나오지만 이들 역시 따지고 보면 굉장한 엘리트들 아닌가? 더 나은 정부가 큰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결말은 얼핏 희망적으로 들리지만, 재난 영화의 메시지로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미국을 향해 노골적인 경외심을 보이는 몇몇 씬들 역시 한국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한 장면들이다.



<신 고질라>는 현대 일본이 가지고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잘 품고 있는 영화다. 우리로서는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어쩌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사람도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의 가치관 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한 번쯤 볼 만한 가치는 있는 영화다. 재미도 있다. 한 번쯤 관람하길 추천한다.


★★★☆

3.5 / 5.0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조커> -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