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친구가 전해주는 재미나는 이야기들
‘회색인간’. 이 책을 주문한 건 우연히 듣게 된 작가의 이력 때문이었다.
글쓰기를 따로 배우거나 전공하지도 않았고 대학은 문턱에도 가지 않은 주물공 노동자. 글을 쓰기 시작할 당시 읽었던 책이 채 10권도 되지 않았다던 그가 궁금했다.
1985년생 부산 출신 김동식.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일찍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인쇄재단, 전화배선공사, 타일 붙이는 일, PC방 알바 등의 일을 하다가 2006년도에 외삼촌의 소개로 서울 성수동 주물공장에 취직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없이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일이었다. 홀로 공부해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차례로 통과했지만, 대학은 가지 않았다.
김 작가는 ‘오늘의 유머’ 사이트 공포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글쓰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싶어 올리기 보다 ‘재미 있다’는 댓글이 보고 싶어 글을 올렸다. 어느 때는 댓글이 궁금해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두편을 올리기도 했다.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다. 인터넷에서 글쓰는 요령 몇 개를 숙지하고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 처음에는 맞춤법도 틀렸고 문장도 어설펐다. 이런 부족함을 독자들이 채웠다. 댓글로 맞춤법과 서사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작가의 글쓰기가 성장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인 글들이 책으로 만들어졌다.
‘회색인간’. 이 책은 글이 아니라 엉뚱한 친구가 말해주는 재미나는 이야기이다. 24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속도감이 있다. 내용 전개가 빠르고, 결말에 반전이 있다. 행간이 넓어 글밥에 대한 부담이 없다. 첫장을 넘기면 3~ 4개 이야기는 금방이다. 특히, 인간의 본성과 욕구가 매 편마다 드러나 있어 감정이입과 몰입감이 크다.
책의 이야기 중 한 편을 간략히 소개한다.
지구의 인류가 포화 상태에 도달했을 때, 정부는 데이터상의 가상 지구로 이주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가상 지구 따위로 이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미는 정책은 있었다.
비노동 인구인 노인들을, 요양원이나 노인정이 아닌 가상 지구로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다. 사실 노인 부양 문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중간생략)
노인이 현실에서의 육체를 버리고, 가상 세계로 이주하게 되면 생물학적 유지비가 사라지게 된다. 또한, 건강상의 문제로 몸이 불편하던 노인들도, 가상 세계에서는 건강한 신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온 가족의 뇌 스캔을 통해 구현한 완벽한 가족 아바타가 함께 하기에, 노인들에게는 실제 현실과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나았다. 함께 살지 못하던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으니까. 가상 세계 속 노인들은 그곳이 가상 세계라는 자각조차 못하였다.
[가상현실 가족 도입 12년차! 아직까지도 디지털 고려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데요…]
TV뉴스를 보던 김남우의 표정이 조금 불편해졌다. 옆에서 그의 아내 임여우가 말을 걸었다. “올해는 아버님 업데이트 하러 가봐야 하지 않아? 벌써 4년째 안했잖아.” 김남우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년에 하자. 돈도 없는데”, “작년에도 그렇게 말해 놓고.” - 회색인간, 디지털고려장 중.
책을 덮었을 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소설에서는 부모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면 언제든지 스마트폰을 통해 가상 지구로 접속해 볼 수 있다. 가상 지구에 사는 부모님은 스캐닝된 아바타 가족들과 식사를 하기도 하고 혼자 쇼핑을 하기도 한다.
가상 지구가 존재한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그리운 이들을 스마트폰으로라도 접속해서 보고 싶었다. 김남우는 끝내 업데이트를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출판사 ‘요다’가 출간했다. 책을 펴 낼 때만 해도 소설을 한 권도 출판한 적이 없다고 한다. ‘회색인간’이 첫 소설책 출판물인 셈이다.
[이 글은 시흥미디어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