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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Oct 28. 2024

오래전 갈망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솔직하고 당당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김영희의 에세이다. 책 속 그녀는 대담한 투사, 용감한 사랑꾼으로 내게 찾아왔다. 오래전 김영희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서 닥종이 인형을 알게 됐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진 닥종이 인형은 표정까지 구체적이어서 단박에 빠져들었다. 오밀조밀한 묘사에서 작가의 꼼꼼함을 느낄 수 있었.


통통한 볼, 반달 같은 눈, 작은 입술에서 그녀의 종이는 예술되고 숨결을 얻는다. 아이와 모녀, 모자의 표정에선 익살미가 고스란히 묻어나 바라보면 절로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다. 옷자락 하나에도 세심한 손길이 닿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다. 공들여 찢고 겹겹이 붙여 만든 김영희의 인형은 네가 되고 내가 되며 가족이 되어 우리와 눈을 맞춘다. 토속적인 느낌이 강해선지 마주칠 때마다 정겹고 사랑스럽다.


기회가 되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2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사이 새로 나온 <엄마를 졸업하다>는 출간된 지도 몰랐다. 삶에 밀려 잊힌 열망으로 지나간 줄 알았는데 누군가 다시 시도할 밑거름이 돼주었다. 작년 한 해 미술심리를 같이 배웠학우가 닥종이 인형을 아냐고 물었다.


"! 김영희 작가요?"


했더니 반가워하며 전시회에 다녀왔다고 했다. 미리 알았다면 당연 관람했을 텐데 지난 뒤의 소식이라 아쉬움만 남았다. 손으로 일일이 찢고 붙이는 활동을 해서 그런가 80세임에도 건강한 모습인 것 같다고도 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평생학습센터에서 케케묵은 열망을 훅 끄집어 낸 것은 그로부터 또 1년이 지난 올여름이었다. 닥종이 인형 수강생 모집 공고가 올라온 것이다. 배움 기간이 넉넉지 않아 닥종이 인형을 만드는 시늉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오래전 엄두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선착순인 관계로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여야 기회를 얻을 수 있으므로 신청 시간 전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째깍이는 시계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이 되는 느낌이었다. 컴퓨터 앞 초몰입 상태는 드디어 신청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첫 수업날. 선생님은 손수 만드신 고운 개량한복 차림으로 몇 가지 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조용하면서도 본인 일에 자부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부족해 서둘러야 하지만 닥종이 인형의 매력을 느끼기엔 충분하다고 말문을 열며 먼저 학우들을 독려했다. 


원래는 철사로 뼈대를 만들고 한지겹겹이 붙이는 작업이 닥종이 인형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지만 우린 그럴 시간이 없어 철사 대신 기성의 인형을 사용했다. 겉으로 드러날 얼굴과 손, 발 부위에 피부색 한지를 붙이는 것으로 닥종이 인형은 생명의 일부를 얻기 시작했다. 붓으로 풀을 바르고 손으로 찢어 섬세하게 붙여나갔다. 닥종이 인형에 관심을 갖고 모이긴 했지만 처음 배우는 과정이라 모두들 한복 입히기가 어설펐다. 여기저기서 선생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이해된 게 분명해 실행하다 보면 어딘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제가 수시로 겉돌다 보니 선생님은 쉴 새 없이 설명해야 했고 교실 안을 종횡무진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한지를 돌돌 말아 가닥가닥 머리카락을 표현하고 땋은 머리까지 만들어 붙이는 과정에선 감탄이 절로 샜다. 풀이 마르기 전 바늘로 선을 그으니 머리카락이 좀 더 섬세하게 표현됐다. 버선, 속바지, 속치마, 속저고리, 겉저고리, 댕기, 고름, 장식용 족두리까지 완벽한 차림새를 갖추기 위해 부지런히 풀칠하며 붙여나갔다. 


한지는 풀을 바르면 부드러워지고 탄력이 생겨 다루기가 훨씬 쉬웠다. 피부톤은 한지를 덧붙이며 자기만의 색상을 구현할 수도 있지만 우린 기본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얼굴과 손, 발에 피부색 한지를 붙이고 빨간 고무신만 신겼을 땐 딸아이가 섬뜩하다고 엄살이었다. 풀에 젖은 한지가 말라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으므로 미완성작은 한동안 거실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알머리에 표정조차 얻지 못한 섬찟한 모습으로.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댕기머리 곱게 땋은 닥종이 인형이 새댁처럼 수줍게 쳐다봤다. 완성하고 나면 각자의 모습과 닮아있을 거라더니 정말 그랬다. 같은 재료로 같은 설명을 들으며 만든 닥종이 인형인데 각자 닮은 모습으로 우릴 맞았다.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찢고 붙이고 매만진 결과는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축소판 같았다.


마음이 좋아했던 닥종이 인형이 세월을 건너 결국 내 손 안에서 생명을 얻었다. 그대로 배출될 수 있었던 이었지만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누리게 되니 설레고 벅찼다. 내 삶에 무늬 하나가 더 새겨진 것 같아 흐뭇한 순간이었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가까이 간 것은 분명 나를 돌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갈망이 없었다면 잡지 못했을 기회가 맘의 허기를 채워준 듯하여 그 기쁨이 훨씬 크게 다가온 배움이었다.

신발,속바지,속치마,겉치마를 갖춘 모습
완성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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