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고 굽고 갈고 끓이며 야채식을 챙겨봤어요. 이혈 테라피를 배우는 중에 채식의 이로움을 전하기에
뭐 별거겠어. 채소만 씻어 썰면 되는 걸. 몸이 새처럼 날아간다잖어.
도전하기로 했죠. 저 혼자라면 간단히 차리겠지만 가족과 함께하려니 아이고! 차라리 밥하는 게 편하지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지지고 볶지 않아서 간편할 줄 알았더니 찌고 굽는 것도 여간내기는 아니었어요. 껍질째 먹어야 효과적인 야채를 뽀득뽀득 씻는 일부터 만만찮았죠. 야채마다 익는 시간이 다 달라 순서 따져 찌려면 찜기 곁을 떠날 수도 없었어요.
건강식을 만들면서 어울리는 소스로 가공품을 사용할 순 없잖아요. 야채식에 딴죽을 거는 거나 마찮가지잖아요. 명백한 반칙인 거죠. 수제 소스까지 만들어야 하니 주방과 친분이 없는 사람으로선 진땀이 날 수밖에요. 지중해식이니 그리팅식이니 자연 식물식이니 해서 목적에 따라 세분화되고 건강한 식단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막상 따라하려니 손이 한가할 새가 없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헹궈내기로 작정한 이상 야채식 밥상은 반드시 동반돼야 할 것 같았어요.
마늘이랑 버섯은 에어프라이어에 굽고 고구마, 단호박, 당근, 브로콜리, 양배추는 찜기에 쪘지요. 파프리카, 토마토는 그대로 썰고요. 삶은 병아리콩에도 자리를 내줬죠. 삶은 달걀로 단백질을 채울까 하다 새로운 식단에 놀랄 아들을 생각해 새우살 조금 준비했어요. 자극적인 입맛에 익숙한지라 거부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했거든요. 웬걸요. 평일엔 샐러드 식단도 괜찮다고 호응해 주더라고요. 대신 주말엔 평소대로 먹자더군요. 다행이지 뭐예요. 공들여 준비했는데 마뜩잖다고 라면이나 끓이겠다면 김새는 일이잖아요.
하얀 접시에 놓인 화려한 색감이 이미 모든 영양가를 흡수한 듯 시각을 애무했어요. 몸이 흡수할 만족에 앞서 눈이 먼저 설레발을 치더라고요. 음식과 갖은 색채와 서두를 것 없는 저녁의 여유가 금세 건강으로 치닫는 것 같았죠. 몸을 해치는 요소들이 떨켜를 만드는 듯했어요.
소스는 두부 소스를 선택했죠. 두부, 깨소금, 레몬즙, 들기름, 소금 약간, 후추, 꿀을 넣어 핸드 블랜더로 갈았어요. 깨소금과 들기름이 들어가 고소하고 담백했죠. 언제부턴가 들기름 사용을 부쩍 늘렸어요. 올리브유도 훌륭하고 아보카도 오일도 이롭지만 들기름 맛이 익숙했죠. 뚜껑 열자마자 갇혔던 고소함이 훅 끼쳐올 땐 입맛도 함께 돌잖아요. 들기름은 오메가3 성분이 두둑해서 심혈관 질환 예방에 뛰어나고 치매 방지에도 으뜸이죠.
원물 그대로 익힌 야채들이 몸에 이롭다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자극적인 입맛에 익숙한 혀가 금세 적응하진 못하더라고요. 밍밍한 채소를 대체하는 소스가 있긴 하지만 사이사이 칼칼한 간이 떠올랐어요. 그래야 속이 좀 후련할 것 같았죠. 오랜 시간 길들여진 입맛이 하루 아침에 변하긴 힘들겠지만 무작위로 선택한 음식에 찌든 몸을 회복하려면 건강 메카로 자리매김한 채식 밥상은 필수겠죠?
평일 저녁으로 샐러드, 토마토 스튜, 토마토 카레를 돌아가며 먹였더니 주말이 기다려진다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실은 시작을 유도한 저도 슬그머니 힘들어지데요. 다양한 채식 메뉴와 소스를 만들기 위해 SNS에 얼씬대다보니 눈도 점점 흐리멍텅해졌고요. 평일엔 가볍게 먹다 주말에 보상하듯 먹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나 싶었지만 주말엔 김치찌개도 먹고, 배달 음식도 시키며 밍밍한 속을 달랬어요. 그러다 자꾸만 생각이 꼬부라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평일에 가꾼 몸이 주말에 헛되는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 같은 거랄까요?
수도승처럼 채식을 고집한 지 한 달이 넘었어요. 몸을 재정비하겠다는 비장한 맹세에 삐딱선이 자라더군요. 그 여지에는 트렌스지방 풍부한 햄버거랑 마가린에 구웠을 법한 토스트가 끼어들었고요. 아주 가끔은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넉넉한 마음까지 은은하게 파고들었죠. 솔직히 주방에서 벗아나야 할 판에 건강을 지키겠단 이유로 두 손 두 발 올인하다 보니 고단했어요. 해보지 않았던 걸 다양하게 준비하려니 메뉴도 달렸고요. 이건 비합리적인 거라고 순간 순간 스스로를 쇠뇌하고 있더라고요.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 끝에서야 바뀐다(너는다시외로워질것이다-공지영)고 한 것처럼 변화는 실로 어려운 과정인가봐요.
건강을 위해 차단하고 절제하며 제철 식재료 활용에 부지런을 떨어야겠다는 생각엔 변화가 없어요. 다만 오차 없이 진행하겠다는 결의에 여유를 갖겠다는 거죠.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음식을 섭취하는 건 오히려 건강에 해롭잖아요. 어떤 사안에서든 지나침과 치우침은 균형을 부수려고 항쟁할 테니까요.
삶의 일부로 음식 섭취의 즐거움은 절대 빼놓을 수 없어요. 음식이 주는 행복이야말로 가장 쉽고 빠르게 자신을 편집할 수 있는 장치니까요. 즐겁게 먹고 건강까지 되찾으면 그야말로 나를 위한 최고의 리마인드가 되겠죠. 그 옛날로 완전하게 돌아갈 순 없어도 지금보다 광은 좀 나지 않을까요? '아주 가끔 허용'이란 찬스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몸에 낀 독소 탈탈 털어 퇴치해 볼게요. 예쁜 포장지에 싸여도 손색없는 건강한 몸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