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인 마음 펴 주는 숲길, 봄에 한 번 걸어보세요

독특한 볼거리로 가득한 경북 문경 '김룡사'... 300년 된 해우소

by 오순미

(이전 글 : '단종앓이'는 영월로, '흥도앓이'는 여기로 가야합니다에서 이어집니다.)


봄볕이 아직 야무지지 않은데도 시린 겨울은 고개를 숙였다. 갈수록 짧아지는 봄이 순식간에 사라지기 전 이른 봄볕부터 챙길 요량으로 3월 첫날 경북 문경시 산북면 운달산에 있는 '김룡사'로 봄마중을 나갔다. 김룡사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후손이 사는 '우마이 마을'에서 차로 30여 분 달리면 닿는 천년고찰이다. '운달조사'가 신라 진평왕 10년(588년)에 창건해 운봉사로 불리다 17세기 이후 김룡사로 고쳐 부르게 된 사찰이다. 한때 성철 스님의 수행 사찰이기도 했다.


큰길에서 멀지도 않고 사찰 바로 앞까지 차가 들어가는데도 깊은 산중인 듯 고요함이 짙은 곳이다. 일주문 아래 차를 세우고 김룡사까지 가는 길은 경사로 하나 없이 평탄해 마음이 느슨해지면서 간결해지는 느낌이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보장문까지 울창한 전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 청량감은 말할 것도 없고 편안하게 다독여주는 비포장 오솔길이 못내 다정하다. 꼬인 심사까지 반듯하게 펴줄 것 같은 곧은 전나무가 고요 속으로 더 깊이 데려가는 숲이다. 1km 남짓 짧은 거리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광고 카피처럼 기억에 남을 길이다. 봄이 무르익어 녹음이 뚜렷해지면 무집착의 경지에도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찰 바로 앞에 주차해도 되지만 일주문 전에 주차해야 고요한 전나무 숲길을 걸을 수 있다. 보장문(금강문)이 작게 보이는 숲길 풍경.


300년 된 해우소


일주문을 지나면 보장문과 만난다. 보장문 두 짝 판문엔 금강역사상이 그려져 있다. 사찰에서 흔히 말하는 금강문이기도 하다. 보장문은 솟을삼문 양식이다. 솟을삼문은 궁궐이나 서원, 향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인 데다 격식을 중시하는 유교적 건축물이므로 사찰에선 보기 드문 형상이다.


보장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 300년이나 된 해우소가 보인다. 재작년 가을에 갔던 순천 선암사 해우소 목조 건물과 같은 질감에서 묘한 생명력이 꿈틀대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 본 재래식 뒷간은 별도의 문짝 없이 칸막이만 있었다. 근심을 풀기엔 다소 쑥스러웠을 법한 개방형이다. 수양이 부족한 탓인지 옛 방식의 해우소는 근심을 풀다 움찔할 것만 같은 낯선 감성이었다.


▲문경시 김룡사 300년 된 해우소(상). 순천시 선암사 오래된 해우소(하) 모습(전남 문화재자료 214호)


보장문 왼쪽으론 운달산 산세와 고색창연한 전각들이 야틈한 돌담 위로 고풍스럽게 펼쳐진다. 각기 다른 전각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풀겠다고 나서기에 서둘러 천왕문으로 들어섰다. 김룡사 사천왕상은 다른 사찰과 달리 목조가 아니라 석조상(화강암)이었다. 부릅뜬 눈과 맞다문 입술이 차갑고 강한 인상을 뿜었으나 비파를 연주하는 동방 사천왕상은 들뜬 동심 같았다.



천년고찰 김룡사


천왕문을 지나면 전각 배치도가 나오고 왼쪽으로 범종각이 보인다. 천년고찰의 역사답게 김룡사 동종은 보물로 지정돼 현재는 김천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종각에 걸린 범종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신라 전통을 계승하면서 조선후기 종 양식을 간직한 김룡사 동종은 제작자 '사인비구'의 종 연구에 중요 자료가 되는 보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리체험공간'에서 100리까지 퍼졌다는 '성덕대왕신종'의 맥놀이(소리의 강약이 반복되며 길고 은은하게 이어지는 현상)를 체험한 후 그 여음에 반해 종을 대하는 마음이 전과 달라졌음을 알아차린다.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 설선당과 보제루 사이 계단을 올랐다. 누각(보제루) 아래 기둥 사이를 통과해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구조가 일반적이지만 김룡사는 보제루와 설선당 사이에 따로 계단을 두었다. 대웅전과 마주 보는 '보제루'는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의 누각이며 법회가 열리는 곳이다. 보제루 앞쪽을 차지한 두 개의 '노주석'은 야간 법회 때 횃불이나 숯불을 올려 등불 또는 온기를 퍼뜨리는데 쓰이는 석물이다. 국내 다른 사찰에선 보기 어려운 독특한 유물 중 하나로 '노반지주'라고도 한다. 단순한 기둥 모양이지만 용도를 알고 나니 특별해 보였다.


▲(상)천왕문에서 바라본 설선당(좌:대강당, 성철스님이 설법한 곳)과 (우)보제루. (하)대웅전에서 바라본 보제루. 보제루 앞 2기의 석물이 노주석.


보제루와 마주보는 '대웅전'은 자체가 '경북 유형문화재 제453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내부에 걸린 '영산회괘불도'와 '영산회상도' 역시 문화재에 해당한다.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으로 지은 대웅전은 오래된 단청이라 어둡지만 수수한 모습이어서 거침없이 다가갈 만한 건축물로 보인다. 그러나 꼭 닫힌 문 안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조심스러운 나머지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게 영 아쉽다.


▲김룡사 대웅전. 내부에 '영산회괘불도(옥외 법회 시 밖에 내다 거는 걸개그림, 보물 1640호)'와 '영산회상도(불상 뒤에 거는 후불도. 경북 유형문화재 524호)'가 있다.


김룡사엔 해운암과 염화실 사이 '공루'라는 예사롭지 않은 건축물이 있다. 사찰의 살림살이와 부식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나 김룡사는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생활 문화와 공간 이용 방식의 변화로 지금은 대부분의 사찰에서 사라진 지 오래라 그 가치가 더 크다고 한다. 빛바랜 목조 건물이지만 김룡사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축물 답게 소박하면서도 꿋꿋해 보였다.


▲상선원에서 바라본 '공루'. 사찰 살림과 부식 창고로 쓰임


상선원(한때 성철스님 거처)을 지나 돌담이 쌓인 응진전 옆길로 올라가면 무성한 소나무가 감싼 구릉지에 '석불입상'과 '삼층석탑'이 거리를 두고 세워졌다. 석불입상은 법의도 검소하고 장신구 하나 걸지 않은 민불의 모습이며 삼층석탑은 1층에 네모 반듯한 틀을 파서 불상을 새긴 단조로운 조형물이다. 김룡사의 약한 지맥을 보완하기 위해 비보 목적으로 세운 문화유산이다. 자연석 그대로 사용해 투박하지만 꾸밈없는 형태가 오히려 친근하다.


▲김룡사가 비보 목적으로 세운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667호)과 '석불입상(경북 문화재자료 제655호)'


김룡사는 일반 사찰의 형식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김룡사만의 특별함을 가진 독창적인 사찰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건축물·보물·문화재자료가 다양하게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제법 큰 규모여서 오랜 내력을 지닌 숱한 볼거리가 이목을 끈다.


무엇보다 무게감 있는 고요함이 김룡사를 찾는 여행자에게 수행의 경험을 나눠주는 듯해 마음까지 가지런해진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지역 사찰을 돌아보며 이색적인 건축물이나 그 사찰만이 가진 특이점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올 봄엔 김룡사가 첫 주인공이다.


김룡사엔 계곡을 끼고 대성암, 화장암, 양진암을 들러 오는 2.6km의 둘레길도 있으니 봄이 푸르른 날 천천히 걸으며 명상의 시간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명부전에서 바라본 김룡사 전각들


https://omn.kr/2hbc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