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돌적인 한 남자와 의기충천 할머니들의 집밥 레스토랑

넷플릭스 할리우드 영화 <논나>를 바라보는 시선

by 오순미

넷플릭스 영화 중 <논나>가 볼만하다며 친구에게 추천받았다. 상영 시간이 길지 않아 그날 저녁 TV 앞에 앉았다. 관람 중 몇 년 전에 본 <바그다드 카페>란 영화가 떠올랐다. 아마도 중년과 노년으로 저물어가는 낯선 이들이 만나 갈등을 겪은 후 관계 회복으로 이어져 누적된 공허를 돌보는 방식이 같아서 그랬던 듯하다.


휴먼음식영화라 할 수 있는 <논나>엔 치열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흑백 요리사'나 시각적인 자극을 극대화한 '푸드포르노' 같은 영상은 없다. 관계와 치유에 치중하는 잔잔한 드라마 분위기다. 극적인 반전도 없이 따뜻한 가족애와 인생을 이야기하며 관객의 시선을 이끈다. 보고 나면 가족이 있어 "참 다행이다"란 생각이 포자처럼 증식한다. 담백하고 구수하고 퐁신하던 엄마의 손맛이 혀를 어루만져 침이 고이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손맛'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아프거나 고단할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며 괜히 목울대가 뻣뻣해진다. 어머니를 여읜 중년 남자 '조 스카라벨라'에게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음식은 생선의 가운데 토막 같은 것이다. 어릴 적 좁은 주방에서 가족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억이 따뜻했던 조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그녀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을 열기로 결심한다.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에게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받은 포근하고 따뜻한 음식을 돌려주고 싶다는 게 그의 의도다. 특히 가족이 더는 없을 수도 있는 사람에게 온전한 가족을 느끼게 하고픈 것이다.


▲논나 셰프는 각자 잘하는 음식으로 메뉴가 될 요리를 선보인다


<논나>는 이탈리아어로 '할머니'이며 영화 원제는 'Nonnas'로 '할머니들'을 의미한다. 조가 생각하는 레스토랑 셰프는 짐작대로 할머니들이다. 가족의 식탁에 올랐던 정성어린 할머니의 가정식이 레스토랑의 특별 메뉴가 되는 셈이다. 식당 운영을 얕잡아 본 건 아닌가 의아했지만 조는 집밥 레스토랑에 꽂혀 직진형 행동가처럼 밀어부친다. 전문 셰프도 아니고 할머니들의 손맛에 의지한 레스토랑 개업이라니 참신하고 독특한 발상이긴 하나 지나치게 낙천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의 친구 '브루노' 역시 무모한 도전이라며 반대하지만 조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받은 식탁의 온기라면 손님들도 충분히 가족의 사랑을 느낄 거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머니댁 같은 레스토랑에서 엄마이고 할머니인 셰프가 차려준 맛있는 집밥이라면 손님은 옛집으로 공간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주변에선 선뜻 조를 납득할 수 없었다. 현실은 감상이 아니라 책임이 따르는 것이므로. 그럼에도 필사적인 조에게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풍요한지 짐작되었다.


뉴욕시에 속한 다섯 자치구 중 가장 뉴욕스럽지 않은 '스태튼 섬'은 이탈리아계 이민자 후손들이 다수인 한적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는 자주 가던 재래시장에 어머니의 이름을 내걸고 할머니의 레시피를 필살기로 이탈리아식 집밥 레스토랑 개업에 착수한다.


어머니 친구, 첫사랑의 이웃, 전직 수녀, 이웃 미용사로 성립된 할머니 군단을 이끌고 인테리어까지 마쳤지만 정식으로 개업하기도 전 시칠리아 할머니(어머니 친구)와 볼로냐 할머니(첫사랑 이웃) 사이에서 거센 지역 갈등이 벌어진다. 지역 갈등은 만국 공통 해묵은 대립인가? 두 할머니의 격렬한 갈등은 작은 화재로도 번졌으나 진솔한 대화로 지나간 아픔과 현재의 결핍을 터놓으며 화합을 끌어내는 명장면을 보여준다.


▲논나들이 처음 모여 인사하는 자리에서 지역 갈등으로 다툼이 일어난 장면


영화 <바그다드 카페>도 사막 한가운데 카페 겸 모텔, 주유소까지 운영하는 여주인이 손님으로 머물게 된 독일계 여인을 의심하며 사사건건 감정 다툼을 벌인다. 하지만 차츰 유대감을 형성하며 내적으로 연대하는 과정에서 치유와 삶의 변화를 꾀해 나간다. 갈등을 회복하며 화해하는 방식이 같아 <논나>를 보는 사이사이 <바그다드 카페>가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레스토랑을 개업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손님은 친인척뿐이다. 섬마을이 가진 특유의 기질은 외부인에 대한 경계와 텃새로 나타나 조를 애먹였다. 그런 중에도 조는 논나들의 주급을 챙기며 기를 살렸고, 다양한 회생법을 강구해 나갔다.


현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냥 잊으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 선택하지 않은 순간들에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자는 논나들의 격려에 조는 울컥하며 힘을 얻는다. 강렬한 의지를 가진 논나들과 논나들의 음식에 자부심을 가진 조는 믿음 안에서 그렇게 가족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노테카 마리아" 레스토랑은 운영 위기를 넘지 못한 채 해체를 선택한다. 조의 자부심과 논나들의 의지는 비록 꺾였지만 그동안 힘써준 이들에게 이탈리아 정통 음식과 가정식으로 풍족한 식사를 대접하며 마지막 만찬을 즐긴다.


<논나>는 가족이 함께하는 식탁의 가치와 즐거움을 마지막까지 공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은 텃세와 경계를 허물고 세대와 문화를 극복하는 열린 공간이 되었지만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관객을 씁쓸하게 만든다.


한 남자의 상실과 그리움에서 시작된 "에노테카 마리아"의 운명은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인적조차 드물었던 "바그다드 카페"가 두 여인의 숨은 재능으로 문전성시를 이룬 것처럼 조의 레스토랑도 구사일생 되살아난다. 2025년 기준 15년째 스태튼 섬에서 소문난 맛집으로 성업 중이며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식당으로 성장했다고 끝자막이 알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므로 뉴욕 스태튼 섬에 가면 조가 운영하는 "에노테카 마리아" 레스토랑에서 실제로 이탈리아식 집밥을 맛볼 수 있다. 지금은 이탈리아 논나 외에도 각국의 논나들이 독특한 콘셉트로 음식을 만드는 중이다.


실화는 아니지만 영화 촬영지였던 '바그다드 카페'도 '캘리포니아 뉴베리 스프링스'에서 여전히 손님을 맞이한다. 영화를 본 관객에겐 여행 중 들러 볼 푸근한 장소가 될 듯싶다.



"당신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려면 걷지 말고 달려라. 당신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요리를 선보일 그 식당으로..."(스태튼 섬 지역신문 기사 중)



뉴욕 스태튼 섬 "에노테카 마리아" 그 식당으로 달려가 논나들의 집밥 한술에 <논나>를 떠올릴 날이 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