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셀라이프 시대에도 '거시기'는 소통의 밑거름

멈춰선 안 되는 '사람 읽기'에 초첨을 둔 소설 <절창>

by 오순미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이 문구는 설명 없이도 마음이 전해진다는 '정(情)'의 정서가 담긴 초코파이 카피다. 한때 우리 국민이 관계와 소통의 본보기로 삼았던 광고 음악으로 따뜻한 정(情)이 사람 사이를 돈독하게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0여 년간 정(情) 하나로 이어온 초코파이가 불쑥 기존의 카피에 대척하는 카피를 들고 나타난다. 새로운 공감을 유도하면서 말이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정(情) 때문에 못한 말 까놓고 말하자."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전체적인 것보다 미세한 맥락을 소비하게 되었다. 각자의 알고리즘 안으로 들어온 쇼츠와 릴스를 즐기고 요약에 열광하며 단기 팝업 스토어에서 색다른 순간을 경험하는 등 '픽셀라이프'에 빠졌다. 서로 다른 배경에선 눈빛만으로 원하는 바를 알 턱이 없기에 '까놓고 말하자'는 카피가 파고든 것이다.


저마다 작고 빠르고 짧은 소비를 선호하면서 세밀한 조각 하나로 전체를 이해하긴 어려우므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소통이 불가한 시대가 된 것이다. 소통은 늘었지만 시선을 마주하고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을 짐작하는 대화가 아니어서 오해의 소지도 커졌다.


그런데 여기 사람의 마음을 빼놓지 않고 읽어내는 능력자 '아가씨(이름 없음)'가 있다. 상대의 상처에 피부가 닿으면 마음, 생각, 감정까지 물밀듯 밀려와 읽히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아가씨'와 그 능력을 사업(범죄)에 활용하는 '문오언'의 이야기가 작가 구병모의 문체로 펼쳐지는 소설이 <절창>이다.


▲구병모 장편소설 <절창>'절창'은 베인 상처라는 뜻이다.


소설은 기약 없이 감금된 '아가씨'의 고립감을 덜어주려고 문오언의 집에 입주한 독서 지도사의 시점으로 흘러간다. 아가씨의 진술과 독서 지도사의 독백으로 서술되는 <절창>은 오컬트와 로맨스, 범죄가 전반을 차지한 소설치고 상당히 차분하게 진행되다 결론이 궁금할 쯤에 의외의 반전이 터진다. 아가씨, 문오언, 독서지도사 세 등장인물이 가진 각자의 '절창(베인 상처)'이 달라서 누구에게 마음을 얹어야 할지 독자로선 복잡다기한 맘으로 읽게 된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양가감정이 교차한다. 범죄를 일삼는 문오언을 악인으로 몰아가는 게 맞지 싶다가도 종종 마음이 쓰인다는 점 때문이다. 특별한 동기로 만난 것도 아닌 '아가씨'를 범죄에 가담하게 하는 것 외엔 애지중지 보호하며 존중하는 모습에서 그렇다. 순정과 범법이 동시에 존재하는 문오언의 마음(속사정)을 알아차리는 건 읽는 내내 독자의 몫으로 남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 중요한 계약서 읽듯 또박또박 읽게 만든다.



어렵더라도 '사람 읽기'가 지속돼야 하는 이유


범죄에 무게를 둔다면 문오언을 홀대하는 게 마땅하지만 그가 가진 순정이 무시되어선 안 될 것 같아 그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소설의 근본이 '읽기'에서 출발했고 '읽기'로 지속되는 데도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쉽게 읽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기분이랄까. '까놓고 말해주면 안 되나?'란 생각에 책장마다 머무는 시간이 다 다르다. 그래서일 것이다.



"어쩌면 타인을 읽어내는 행위는 세상에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존재해 왔을 때부터 생래적인 능력인 거 아닐까."(186쪽)


이 말에 일정 부분 의문이 들기도 하는 것이. 물론 다양한 의미를 가진 '거시기'란 대명사는 소통하는데 전혀 문제 없다. 타인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임에도 동일한 의미로 파악되어 무리 없이 잘 쓰이고 있다. 아마도 직전의 맥락, 미세 동작, 표정, 어조, 강세까지 잘 살피며 상대에게 집중할 때라야 비로소 '거시기'는 같은 의미로 전달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러나 과연 '거시기'는 사용자 모두의 의미를 완전하게 소화하는 걸까? 불충분하지만 같은 소리말로 퉁치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소설은 그 질문에 어떤 대답조차 남기지 않는데도 우린 여전히 타인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읽어내려 애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이지만 이해의 정도는 저마다 다르다. 각자의 마음에 서로 다른 형태와 질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자의 경험에 따라 수용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수긍과 거절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당연하잖은가. 책이 의도한 대로 바르게 응할 때도 있지만 오독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물며 사람 읽기는 어떻겠나. 둘 다 텍스트이긴 마찬가지지만 복잡성과 가변성을 가진 마음은 또 다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렵다는 이유로 '타인 읽기를 미루거나 포기한 적 없었나?' 해서 한편으론 불편한 마음이 차오른다.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읽기의 자리에 살기를 넣으면 어떻습니까."(205쪽)


작가는 그래도 읽기를 이어가라 말한다. 읽기는 곧 살기이고 한 존재를 살게 할 힘이 될 수 있다면서. 지속적인 읽기는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으므로 우리의 타인 읽기도 멈추어선 안 될 것 같다.



타인을 읽고 이해하려 애쓰는 건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우리가 타인을 읽고 이해하려 애쓰는 이유는 불필요한 오해와 관계의 불안을 덜기 위함이다. 결국 타인을 읽어내는 행위는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타인의 상처가 '나'의 관심과 이해로 아물고 정돈되는 순간 우린 비로소 편안함에 이른다. 서툴고 미숙해도 사람 읽기가 지속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해받고 싶은 타인의 마음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문오언이 자해를 하면서까지 '아가씨'에게 읽히길 바랐던 것처럼.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344쪽)


사랑은 상처로 발효되고 상처 없는 관계는 불가능하니 상처를 읽고 이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작가는 에둘러 말하고 있다. 사적인 순간에 몰입하고 환호하느라 어쩌면 우린 이해받을 누군가를 외면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방치와 무관심의 대상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선 '까놓고 말하는' 적극성을 띄는 것이 빠르겠으나 말로 꺼내지 못한 마음을 이해받았던 순간이 있다면 타인의 마음이 와 닿도록 내 마음 먼저 열어보는 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