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유년

나의, 나의 검정 코트

by sodoi


문득 내 삶이 큰일 났다고 생각한 건 음식을 먹는 행위가 더 이상 즐겁지 않다고 느꼈을 때였다. 몇 년 간 전국 맛집을 찾아다닐 정도로 좋아해 마지않던 쌀국수를 먹다가 갑자기 가슴이 내려앉았다. D는 내게 벌써 배가 부르냐고 물었다. 나는 덜컥 눈물이 나려는 걸 참고 대답했다.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D에게 미안했다. 쉽지 말자고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도 우리는 늘 어려운 생각들을 나눴다. 나눌수록 커지는 사나운 욕심 같은 생각들이었다. 오늘만은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며 나는 차에서 내렸다. D에게 어떤 인사를 건넸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나는 '사고 실험'이란 것을 시작했다. 나의 유년기부터 시작해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고스란히 나열해보는 일이었다. 겁이 나서였다. 경우의 가지들 중 잘못된 가지를 선택하고선 그 가지에서 꽃을 피워보겠다는 속셈일까 봐.


전과 같았다면(작년 말까지만 해도) 이런 마음이 가지는 중압감 때문에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라며 책망했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부터 시작된 D와의 관계는 나에게 꽤나 소중했다.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D 덕에 나는 변하고 있었다. 내 소중히 여김을 D가 잘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느 때면 D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여하튼 사고 실험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5살 때 유치원에서 야외 놀이 시간이 끝나고도 홀로 교실로 들어가지 않은 적이 있었다. 커다란 수영장 뒤편에 숨죽이고 있다가 누군가 나를 찾으러 오면 놀래 줄 속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고-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그렇게 그곳에서 잠이 든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의 나는 어른이 되어, 어른이 되면 입을 수 있는, 긴 검정 코트를 멋지게 걸치고 있었다. 부쩍 추워진 요즘 내가 입는 검정 코트와 같은 것이었다. 그 사이 가지들을 하나씩 나열해보는 것이다. 검정 코트 사이의 간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선택들을. 그날 잠에서 영원히 깨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다음 날 수채 파스텔을 사지 않았다면, 혹은 수채 파스텔 대신 자전거를 사서 교통공원에서 신나게 달리다가 길을 잃어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면.


어린아이들은 금방 커버린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많은 것을 기억하며 자랐고 기억들은 어쩐지 면구스러운 데가 있어 자리만 차지할 뿐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는 D에게 모든 일을, 나의 창백한 유년을 다 털어놓아버릴 것임을 안다. 그러면 D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엇이든 담아낼 역능을 가진 D니까 과거의 기억을 경험 삼아 현재의 의식에 무사히 떠올릴까. 그저 말없이 집에 데려다줄까. 소리 없는 대꾸를 보여줄까.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해줄까.


내게는 현전이 가장 두렵다. 불가해한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잔인하다. 삶을 채색해 나가는 것은 바지런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 티가 난다. D에게도 이것을 바라만 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쉬운 것이 없다.


D는 내 표정을 읽는다. 엊그제는 함께 불꽃놀이를 했다. 내가 지나가며 불꽃놀이하는 아이들을 봤다는 이유로. 올해가 벌써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입맛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지만 나는 살아내기 위해 먹는다. 어쩌면 사고 실험을 하기 위해 먹는다.

오늘은 D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겠다.


D가 선물해준 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