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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속에서 길을 잃다

by 기운찬

최근 번아웃이 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인 개발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생각했던 것들을 실행하면 무언가 일어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성과는 나오지 않았고 내가 처한 현실을 마주하자 나는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흐린 눈으로 현실을 회피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히 예견된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가만 보면 너는 J가 아닌 것 같아..'


통화 속 누나의 뼈 때리는 말이었다. 본인이었다면 실패에 대한 플랜 B, C, D까지 생각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플랜 B 조차도 세우지 않았다.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20대 후반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당시에도 내가 열심히 하면 결국 원하는 걸 이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심히'만으로는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나는 그때의 실수를 또다시 저지른 것이다... 비참했다.



갈대밭 속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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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 가는 길이 맞기는 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의 선택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때 다르게 했어야 했나?', '왜 이렇게 바보같이 했을까' 등 스스로 자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자책을 하면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더라. 여러 가지 옵션들이 있었지만 모든 옵션이 의심스러웠다. '이걸 하면 정말 될까?, '또 실패하면?', '더 이상 실패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들로 인해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평소 가지고 있던 원칙과 가치들까지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 이게 번아웃이구나...'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증상, 이런 정신적 탈진을 번아웃이라고 한다. 나는 번아웃을 혼자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동료, 지인, 친구, 가족에게 다짜고짜 연락을 했다. 내 상황을 알리고 조언을 구했다. 연락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번호를 누르고 문자를 입력하는 순간순간 나는 더 작아졌고 비참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내 안의 소년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비참함을 온전히 견뎌내야만 했다.


너무나도 감사하게 모두들 진심 어린 걱정과 응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든 돕기 위해 애써주었다. 내 말을 들어주었고, 응원하고, 위로해 주었다. 그들 덕분에 주저앉아 울기만 하던 소년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감사해서 다시 나 자신을 믿기로 했다.



주인공의 문제 해결 능력


다시 일어서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갑자기 신이 내려와 내가 가진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면 좋겠다.(상상만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도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된다.


내가 웹툰 스토리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주인공의 문제 해결 능력이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졌다고 해보자. 만약 조연 캐릭터가 등장해서 적을 무찌르고 주인공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준다면? 독자들은 그 주인공에게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주인공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절정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캐릭터성이고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빠지는 매력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주변의 도움을 받더라도 결국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나만의 위기 극복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캐릭터성이고 그것이 '나다움'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능력이다.



갈대를 헤치고


이제 갈대를 헤치고 다시 걸음을 옮길 때이다. 그러기 위해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점검하고, 내가 해야 할 것들을 추려야 한다.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내 계획을 당당하게 드러내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 세운 계획도 곧 바뀔 것이고, 나조차도 내가 가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다운 길을 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 내가 현재 단계에서 지키고 싶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원칙 -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선택하라.

2원칙 -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를 파악하고 제거하라.

3원칙 - 불편하더라도 내가 해보지 않았던 것을 시도하라.


번아웃이 오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지고 예전으로 돌아가 안주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번아웃은 또 다른 형태로 나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불안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지독히도 방해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불안을 가진 상태로는 아이디어도 생산성도 원래의 수준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불안을 제거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을 정의하고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어떤 행동이 불편하다는 것은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그것이 필요한 행동이라면 불편하더라도 해야 한다. 실제로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것들은 당연히 낯설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편함은 기회이다. 이전과 다른 나를 만들 기회, 내 삶을 바꿀 기회 말이다.



끝나지 않은 번아웃


아직 번아웃은 끝나지 않았다. 하루에도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어느 순간에는 열정이 다시 올라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다짐도 하지만, 어느새 다시 무너져 원점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폭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 침착하게 하나씩 하나씩 실타래를 풀다 보면 꼬여있던 문제들이 풀어질 것이다. 설령 더 꼬이면 어떠한가 실 끝을 찾아 다시 시작하면 되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오늘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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