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선전담변호사가 들려주는 사건 이야기 -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라
강력범죄가 발생하고, 언론에서 범인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면 어김없이 이런 지적이 나온다. 범죄자가 범죄에 저지르기까지의 개인적인 사정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범죄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고, 자칫 범죄자를 영웅시화 하는 사태까지 이를 위험도 있다. 피해자에게는 가해자의 사정을 언론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도 2차 피해가 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범죄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처음부터 범죄자로 타고난 사람은 없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 그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 또는 조금 특이하지만 특별한 문제는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범죄를 저지른 순간 그들은 그제야 범죄자가 되었다. 평범했던 그들이 어째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까? 범죄 자체는 분명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사정은 분명히 있다. 범죄자에게는 분명 "서사"라는 것이 있고 그 어느 지점에서 범죄가 탄생한다. 그들의 삶과 범죄 사이에 "이렇기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은 인정할 수 없지만, "이렇게 되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인과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지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간절히 원하고 있기도 하다. 국선변호인으로서 재판을 앞둔 피고인들을 만나러 교도소에 가 보면 피고인들은 할 말이 많다. 조용하던 피고인도 그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기 시작하면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많고,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도 많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다. 어이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사정이 있고 할 말이 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극한의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은 아닐까?
변호사는 피고인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법원에서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나 범죄를 수사하는 검사는 변호사보다 더 많은 형사 사건을 담당한다. 하지만 피고인과 마주 앉아 사건의 경위와 피고인이 살아온 삶을 제대로 들어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변호인만이 가질 수 있다. 그들은 검사와 판사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변호사 앞에서는 털어놓는다. 물론 한 두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들은 이야기라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오히려 피고인의 원래 삶과 전혀 관계없는 짧은 인연이라는 점에서 더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도 하다. 오랜 친구보다 잠깐 만나고 헤어질 사람에게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게 되는 경험, 다들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구체적 사건에 있어 범죄자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 사회가 들어주는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내 글이 그 사이에 존재하면 좋겠다.
나는 지난 8년 동안 국선변호사로서 1,000건이 넘는 사건들을 담당했고 지금도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내가 실제로 담당했던 사건들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담당했던 사건들을 글로 쓸 것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기에 따로 메모를 해두거나 기록을 남겨두지는 않았다. 재판을 하며 제출했던 의견서들과 최종변론 논고만이 내 컴퓨터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는 남아 있는 의견서와 최종변론 논고만을 단서로 희미해진 나의 기억을 더듬어 쓰는 내용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들임이 분명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변호사의 비밀유지 의무 때문에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사건을 통해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았기에 절대 픽션이 될 수 없음을 얘기하고 싶다.
자,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다 같이 한번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