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힘, 양날의 검
관계구성이론은 수많은 실험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언어와 인지에 대한 과학 이론이다. 직접 경험에 의한 학습이 고전적 조건화와 조작적 조건화라면, 관계구성이론은 언어에 의한 학습을 통해 경험하지 않은 것도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실험 연구에서 언어능력이 부족한 침팬지 혹은 어린아이에게 즉각적인 보상과 지연된 보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즉각적인 보상을 선택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나, 언어능력이 충분한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즉각적인 보상이 아닌 다른 가능성도 추론할 수 있고, 지연된 보상이나 경험하지 않은 선택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경쟁력 있게 진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럼 어떻게 인간은 언어를 배울까? 우리가 어릴 때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사회에서 정해준 소리, 글자, 그리도 해당 소리나 글자가 의미하는 사물을 보면서 단어를 배운다. 소리=글자=사물, 이 같은 대등관계를 반복하면서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예) 고양이(소리) = 고양이(글자) = 고양이 사진(실제 동물)
A가 B와 같다는 사실을 배우면, B가 A와 같다는 사실도 안다. A가 B보다 크다고 배우면, B는 A보다 작다는 것을 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것 또한 언어의 특성이다. 인간은 이처럼 관계 구성이 가능하다.
각각의 단어는 다른 수많은 단어들과 관계를 맺고 있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이미 많은 관계틀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세상을 다양한 관계틀 안에서 바라보게 된다.
관계틀(Relational frame); 대등, 유사, 반대, 비교, 시간, 인과, 위계, 구별 등등
예1) 현재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반대로 불행을 떠올릴 수 있다.
예2) 지금은 걱정했던 상황이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미래에는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수 있다.
예3) 돈을 잘 벌고 있는데,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언어의 특성은 사실상 모든 단어가 무한하게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개인의 생각, 느낌, 감각, 기억이 더해지면 내가 경험한 자극, 사건과의 관계가 어떤 단어에서도 유도될 수 있다. 처음에 가지고 있던 중립적인 물리적 속성과는 무관하게, 같은 단어라고 해도 맥락에 따라 부정적이 될 수도 있고, 긍정적이 될 수도 있다.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들이 임의적으로 언어와 인지를 통해 추론될 수 있다.
이렇게 관계구성에는 한계가 없다. 미래는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 속에서 상황을 관계적으로 구성하는 능력으로 창조한 것이다. 직접 접촉하지 않은 사건을 ‘미리’ 다룰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언어적으로 구성(관계적으로 구성)할 수 없으면 실제 현재의 것과 ‘비교’ 할 것도 없고 ‘실망’ 하지도 않는다.
책상에 음식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맛있어 보인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먹으려는 행동과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지나가면서 누군가 “이거 좀 더럽다”라는 말을 하면서 지나갔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음식의 물리적 속성은 변함이 없다. 외부세계도, 오감도 그대로다. 단지, “더럽다”라는 단어를 들었을 뿐이다. 우리 내부 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그리고 그로 인한 행동과 태도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오히려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더 생각나지 않았던가?
관계 구성의 우위성
처음 규칙을 알려준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비교하는 실험이 있다. 중간에 규칙을 바꾸게 되면 처음부터 규칙을 몰랐던 집단이 새로운 수반성에 더 민감하게 작용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환이 빠르고 대처를 잘한다. 반면, 처음 규칙을 알고 있는 집단은 규칙이 머릿속에서 장애물로 작용하기 시작해서 새로운 규칙을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내 머릿속의 규칙과 생각들이 마치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나를 조정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무한히 확장되는 언어의 특성은 사실상 완전히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한번 확립된 관계는 옅어질 수 있지만 제거하기는 어렵다. 뇌과학적으로도 우리의 뇌 회로에 뺼셈은 없고 덧셈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축복이기도 하지만,
어두운 측면도 있다
인간의 언어와 정신병리
자살하는 유일한 종은 인간이다.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고통이 심하거나 괴로우면,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고통으로부터 자유”, “더 나을지도 몰라”라는 내면의 추상적 개념을 관련짓기 시작한다. 사후세계를 경험해보지 않았는데도 이런 개념을 가지고 뛰어드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고 한다.
많은 불안과 관련된 환자들은 "불안을 없애야 한다" "통제해야 한다" "피해야 한다" 등등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생각으로 "의사 선생님이 뭔가 더 효과적으로 불안을 없애는(통제하는) 방법을 알려줄 거야"라는 생각으로 병원에 오기도 한다. 수용전념치료에서는 불안을 없애는 것이 치료 목표가 아니다. 당신의 생각을 없애거나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인간은 관계구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있거나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창조적 절망감과 심리적 유연성
그렇다면, 우리는 관점을 달리 봐야 한다. 불안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당신이 했던 행동들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그럼에도 그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그 순간에 어떤 생각에 빠져있는지, 둘러싸여 있는지 알아차려보자. 단단한 그 관계 틀을 알아차리고, 조금씩 틈을 벌려나가 보자.
오늘은 언어와 인지에 대한 관계구성이론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생각해보면, 언어는 진료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치료(행동 변화)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면담(언어), 치료실(환경), 치료시간(새로운 경험, 학습)이 존재한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내부 세계를 바꿀 수는 없지만, 외부환경에서 언어를 이용하면 변화를 유도할 수는 있다. 새로운 자극과 연결 지어주고, 그 맥락에 영향을 끼치고 행동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수용전념치료에서 은유를 사용하는 것도 관계구성이론에 근거한 비슷한 맥락이다.
Ref. 대한맥락행동과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