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 없는 소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소설을 바탕으로 한 2022년 아일랜드 영화
'불쌍한 것. 내 딸이라면 낯선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을 텐데... '
'…두 분에게 아들이 있었다고요... '
투명하다. 샘물 위로 햇살에 반짝이는 초록 잎들, 바람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이 영롱하게 일렁인다. 위아래가 뒤집힌 채로.
어쩌면 이 둘의 만남은 연민으로 서로를 향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흙탕물처럼 뿌옇던 각자의 세상이 다시 맑아지기 시작했던 건지 모르겠다.
'뜨거워요.''
'익숙해질 거야.'
씻으려고 욕조에 들어가는 소녀가 놀라 뜨겁다고 한다. 킨셀라 아주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익숙해질 거라고 하는 장면이다. 소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다. 누군가 씻겨주는 것도, 괜찮다고 하는 따뜻한 말도.
스틸 사진 같은 영상의 장면 장면에 감정이 덧입혀진 말 없는 영화. 영상 속 인물의 표정과 모습, 한 두 마디 정도의 대사로 상황을 심플하게 표현한다.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으면서 다양한 인물의 성향, 그 사이의 역동을 말 그대로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일상의 장면이란 늘 아름답지 않게 기억된다. 그러나 영화 속에는 그런 별 것 없는 일상의 순간들이 찍혀 있다. 그런데 그 풍경이 왜 이리 낯설지가 않은지, 그 속에 언젠가 내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일랜드의 바람소리, 햇살냄새, 나무길들이 가슴으로 차분히, 말없이 들어찬다.
책: 맡겨진 소녀, Foster, 클레어 키건 소설
(요즘은 책이 안 팔린다고들 하지만, 사실 책을 사기가 부담스럽다. 디지털로 간편화 되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이제야 오래 묵은 책짐들을 좀 덜어 낼 수 있을까. 집은 좁고, 책은 무겁다. 읽지도 않는 책들은 죄책감들로 그 무게를 더한다. 읽는 행위가 중요할 텐데, 요즘은 인테리어용 가짜책들도 많다고 한다. 의아한 일이다. 책은 넘쳐나고 읽을 만한 책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또 읽어야 할 책들은 어렵기만 하다. 얇은 책이라 서점에서.)
궁금해진다. 왜 타임스에서 "키건은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다."라는 찬사를 한 건지.
그런데 이거... 별거 없는데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감정이 뭔지 또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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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문장들]
킨셀라댁에 도착했을 때 존이 '댄' - 댄이 '존'이라고 한 마디씩 대치적으로 부르는 장면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 아빠는 늘 빤한 거짓말
"늘 똑같다. 아빠는 어디에서든 뭘 먹고 나면 오래 머물지 않는다." 19page
: 사실 이 부분에서는 나 자신을 떠올렸다. 아빠라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은데, 코오테의 아빠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연민을 느낀다.
뭘 그렇게 서두르냐는 킨셀라 아저씨의 말에 아빠는,
"시간이 아깝잖아요. 감자에 약도 쳐야 되고." 20page
: 나 역시, 부모님 댁에 가면 언제나 의무적으로 가서 먹고 바로 집에 가야 한다고 서둘러 나선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까. 늘 죄인 같고, 늘 불안하고, 그래서 늘 시간이 없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하는 일은 없지만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있고, 해야 한다고. 괜한 마음에 허세를 잔뜩 부리곤 한다.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20page
"호기심에 통째로 잡아먹힌 사람 같다." 62page
: 재미있는 표현들이다.
"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30page
: 얼마나 싫은 마음인 걸까. 나도 어린 시절 아빠를 나 자신이 끔찍해질 정도의 감정으로 싫어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쁘게,혐오의 감정을 표현해 내다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따라 밭을 다시 지나올 때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으면 아주머니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을 끼를 생각하다가 평소에는 틀림없이 양동이를 두 개 가져왔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기분들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31page.
: 소름이 끼치는 문단이었다. 내가 픽한 최고의 문단. 사랑은 그냥 주는 것도 그냥 받는 것도 아니고, 균형을 잡아가는 것.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그런데, 그런 때가 없었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또 행복한. 마음. 단 하나의 소중한 마음.
"사람들이 왔다 가고, 들락날락 거리고, 악수를 나누고, 먹고 마시며 죽은 남자를 보고, 정말 멋진 시신이라고. 드디어 끝나서 행복해 보이지 않느냐고. 누가 그를 관에 눕혔느냐고 말한다. 또 일기 예보와 옥수수의 수분 함량에 대해서, 우유 할당량과 다음 행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킨셀라 아저씨의 무릎 위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것만 같다." 60page
: 죽은 사람에 대한 표현과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반응들이 담담하게 그려지는 표현이 놀라웠고, 정말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끝나서 정말 행복하겠다.' 라니, 그런 말을 그 누가 감히 할 수 있을까.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장례식장에서 그럴 수 있겠지만… 다른 이유로…) 그저 생각만 하던 용감한 표현을 만나 고마웠다. 내가 이야기하면 '그런 이야기하면 못써!'가 되고, 이렇게 대단한 작가가 이야기하면 멋지고 뭔가 깊이가 있는 표현이 되는 법이니까.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아." 73page
: 이 말도, 요즘 내 생각과 동기화되어 계속 곱씹게 되는 표현이었다. 나의 최근 표현은 "말을 멈추고 싶다. 소화되지 않은 생각들을 토해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마지막 문장.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98page.
:이건 뭐. 정말.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모든 상황과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 낸
진짜 찬사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구나.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이 소설과 영화.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