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 속 개인, 그리고 어떤 방향

4. 조지 벨로우스, 뉴욕

by Ayla J


George Bellows, New York, 1911, oil on canvas, 106.7 × 152.1 cm, National Gallery of Art


군중 속 개인, 그리고 어떤 방향


빽빽한 화면. 높은 건물과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 화면 정가운데에는 벽돌 혹은 건축 자재로 보이는 노란 더미를 실은 마차가 지나간다. 유일하게 밝은 색이라 잠시 시선이 머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더미는 결국 도시를 더 견고하게, 더 촘촘하게 만들 재료다. 화면 뒤편에는 광고 간판이 붙은 어두운 건물들이 하늘을 거의 가린 채 둘러서 있고, 어디에도 숨 쉴 틈이 없다. 생명을 상징하는 푸른 기운은 보이지 않고, 앙상하고 마른나무 몇 그루만 어색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 안에 있으면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것 같다. 물론 어딘가로 향하긴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처럼, 각자 나름의 목적과 목표를 향해 걸을 것이다. 그런데 이 풍경 속에서는 그 목적들이 하나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저 많은 사람들 중 나 하나쯤 빠져도 이 그림의 풍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결정을 해도, 어떤 목표를 세워도 유일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결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그냥 남들 따라, 흐름 따라 흘러가는 게 맞는 걸까?


문제는, 그런 길이 항상 나에게 맞는 길인지는 아무도 대신 확인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선택도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동시에 '차별성'과 '고유성'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다수가 이미 검증한 길이 맞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서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역설 속에 우리는 서 있다.


익명의 군중, 그리고 광고 간판의 목소리


조지 벨로우스(George Bellows, 1882–1925)의 「New York」(1911)은 뉴욕 맨해튼 매디슨 스퀘어 일대를 바탕으로 한 가상의 합성 풍경으로, 20세기 초 산업화된 대도시의 역설을 한 화면에 압축한 작품이다. 애슈캔 스쿨(Ashcan School)의 일원이었던 벨로우스는 인상주의나 살롱 미술이 외면했던 '거칠고 실제인 현실'을 그렸다. 애슈캔 스쿨은 20세기 초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 도시 리얼리즘 그룹으로, 이상화된 풍경 대신 일상과 거리, 노동계급과 이민자, 뒷골목과 같은 도시의 거친 단면을 화폭에 담았다.


「New York」에서 인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지워진 작은 실루엣으로 처리된다. 개인은 군중과 자본, 교통 시스템 속에 흡수된 익명의 존재처럼 보이고, 광고 간판은 하늘보다 더 큰 목소리로 화면을 점령한다. 벨로우스는 교통·광고·건물·인파를 한 화면 안에 밀어 넣어, 한 평론가로부터 "움직임과 소음, 숨 가쁜 생동감이 가득한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생동감'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각자의 의지로 움직이는 생동감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방향을 따라 일제히 흘러가는 흐름에 가깝다. 광고 간판이 외치는 목소리는 개인의 목소리보다 크고, 건물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인다. 방향을 스스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방향에 떠밀려 가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검증된 길과 나만의 표지판


이 그림이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 더욱 첨예하다. 2026년의 우리는 1911년의 뉴욕보다 훨씬 더 많은 '광고 간판'에 둘러싸여 있다. 피드를 스크롤하면 누군가는 외친다. "이 길로 가면 성공한다", "이렇게 하면 돈 번다", "지금 안 하면 놓친다". 팔로워 수십만의 인플루언서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이미 검증된 것처럼 보이고, 그 길을 따라가면 적어도 뒤처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따라간다. 모두가 향하는 방향이니까, 그게 '정답'일 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만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차별성은 무엇인가요?" 군중 속에서 따라가라 하면서, 동시에 고유하라고 요구한다. 검증된 길을 가라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길을 만들라고 한다.


벨로우스의 그림 위에 가상의 표지판을 세워본다면 어떨까. 모두가 빽빽하게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도시에서, 나만 볼 수 있는 투명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면, 어디에 세울 것인가. 그 표지판에는 어떤 한 줄을 써넣을 것인가.


아마도 답은, 완벽한 방향을 찾는 데 있지는 않을 것이다. 군중 속에서도 내가 세운 표지판이 정말 나를 향한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것. 벨로우스가 포착한 1911년의 뉴욕이나, 2026년의 우리 삶이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이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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