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경기의 시작 - 탄생 誕生 [다섯 번째 이야기]
- 아빠, 나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첫째로 아빠는 나에게 매일 일기 쓰기를 습관화하도록 했다. 이 글을 쓸 수 있는 힘도 그때의 그 일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성장하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된 것 역시 맞다. 다섯 살짜리 어린이 역시 일기를 쓰려면 하루를 되돌아보아야 하고, 그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나 느꼈던 감정을 되새겨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생활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에게 하루 한 편의 일기를 쓰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어린 나이에 자아 성찰과 자율적 개선을 생활화하게 만들었다. 또한 내가 쓴 일기 밑에 달린 아빠의 코멘트는 내가 쓴 잘못된 표현을 수정해주거나, 참신한 표현을 소개해 주며 더 나은 글쓰기를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물론 ‘일기 교육을 통한 사고력 및 표현력 강화’는 아빠의 선견지명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반복되는 검사는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나는 매일 여덟시에서 아홉시 사이에 일기를 써서 아빠에게 제출해야 했는데, 하루는 일기 쓰기가 너무 귀찮아 대충 쓴 다음 아빠에게 검사를 맡으러 갔다. 아빠는 내가 쓴 글을 읽다 말고 일기장을 허공에 집어던지면서 “이렇게 쓸 거면 때려쳐!”라고 소리쳤다.
아빠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일기장이 날아가며 종이끼리 서로 부딪쳐 내는 소리, 그리고 그 소음 이후에 수 초간 이어졌던 차가운 정적은 다섯 살짜리가 감당해내기에 너무 버거웠다. 일기를 다시 써서 검사를 맡고 거실 소파 구석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애써 감춰야 했던 그 날을 기점으로, 나에게 ‘오후 여덟시에서 아홉시 사이 일기검사 시간’은 ‘이십일시에서 이십이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군인의 야간 점호시간’보다 더 피말리는 시간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슬슬 나는 솔직한 감정을 담는 데에 집중하기보다 색다른 표현을 담아내려 노력하면서, 아빠에게 나의 글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힘썼다. 본질은 퇴색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교육적인 면에서의 부작용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른아홉의 신참 아빠는 자녀 교육에 대해 누구보다 당찬 열의를 가지고 있었으나, 열의를 행동에 녹이는 방식에 있어서는 부족했다. 나의 첫 번째 선생님인 할머니는 자식 셋은 물론 대여섯 명의 조카들도 거뜬히 키워낸 유아교육의 베테랑이었던 반면, 아빠는 부모나 교육자로 산 지 불과 다섯 해밖에 지나지 않은 ‘풋내기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아빠는 아이의 감정에 공감하는 힘이나, 아이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일기와 함께 또 아빠가 중요시했던 것은 수학과 한자였다. 유치원에 다녀와 일기를 쓰러 조용한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빠와 나는 조그만 스툴을 놓고 마주 앉아 수학과 한자를 공부했다. ‘스툴 학교’에서 나는 불과 일곱 살에 초등학교 5학년 수학 교육과정을 완벽히 마쳤다. 열한 살 때는 큼지막한 고사장 책걸상에 몸을 걸쳐 올려놓고 다 큰 어른들 사이에 끼어 한국어문회 한자능력검정시험 2급을 취득했다.
그쯤 되자 주위 지인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천재인 양 치켜세워 주곤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내가 느끼기에 나는, 그저 아빠가 열정을 다해 만들어낸 보기 좋은 로봇에 가까운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