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0:01-16 남은 자 1 : 예레미야와 그

예레미야 40:01-16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예레미야 40:01-16 남은 자 1 : 예레미야와 그다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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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군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상황을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이어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는 유다의 남은 백성을 위해 포도주와 여름과일을 모으게 합니다. 요하난이 미스바로 돌아오는 유다 백성중에 그다랴에게 악감정을 품은 위험한 인물들이 있음을 경고하지만 설마하면서 새겨듣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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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9:11-14)절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재난을 선포한 것임을 오히려 이방인이 인정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다가 라마에서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석방됩니다(1-2절).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풀어주면서 자기와 함께 바벨론으로 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유다 땅에 남을 것인지 마음대로 하도록 제안합니다(4절). 그는 예레미야가 대답하기 전에 [‘아직 돌이키기 전에’; 약간 본문을 수정하여 ‘네가 남기를 원한다면’으로 읽기도 한다.] 다시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있든지, 또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에게 길에서 먹을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냅니다(5절). 예레미야는 그다랴에게 와서 미스바에 머뭅니다(6절).

예레미야는 자신의 운명을 동족의 운명과 함께 합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보면] 친바벨론적 신탁을 선포했지만 바벨론 점령군으로부터 어떤 혜택도 구하지 않고 동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합니다. [무화과 두 광주리의 환상(24장)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제1차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있음을 선포했지만] 아마도 예레미야는 폐허가 된 유다 땅에 아직 자신이 할 일이 있음을 자각하고 남은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를 환대하는 (이방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의 신하들은 예레미야에 적대적인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대조됩니다. 39:13에 의하면 느브갓네살은 ‘모든 장관’을 보내 예레미야를 석방시키고, 38:4에 의하면 시드기야의 신하들은 예레미야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40:1-6의 예레미야 석방기사는 현재의 문맥에서는 40-44장의 서문 역할을 담당합니다. 39:14는 그다랴를 족보로 소개하는 반면에, 40:5절은 바벨론의 왕에 의해서 ‘유다 성읍들의 총독’으로 임명된 자로 소개합니다. 예레미야의 석방은 한편으로는 순종하는 자를 멸망으로부터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보여주며(39:11-14),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 왕조의 멸망이 유다 민족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 의지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40:1-6).

앞 장과 본 장에 있는 예레미야에 대한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다랴에게로 간다.”는 것인데, 차이점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포로로 잡혀가다가 중도에 석방된다는 점입니다 : 역사적으로는 둘 다 가능하다. 바벨론에서 예레미야를 모르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입장에서 예레미야는 자기편입니다.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주장했기에, 그래서 사로잡혀 갇혀있기에 점령군에게는 예레미야에게 자유를 주었을 것으로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에 예레미야가 다시 풀렸다가도 다시 잡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국자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풀려났어도 바벨론 군인들이 많은 이들을 포로로 데리고 갈 때에 함께 또 잡혀갔을 수도 있습니다(예레미야를 잘 모르기에) 또 경비대 뜰안에서 포로로 잡혀가다가 중도에 알게 된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석방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두이야기는 깨끗하게 하나로 읽기는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39:11-14, 40:1-6)

여기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유다 백성들, 특히 시드기야와 관료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거절하는데 반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특히 느부갓네살과 그의 관료는 예레미야를 인정합니다. 이러한 대비로 이방인보다 못한 하나니의 백성이 멸망을 하나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이렇게 수습할까? 바벨론은 이 혼란을 달리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향후에 애굽을 침략하기 위해서 가나안 지역의 안정이 필요하고, 애굽과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안정시키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총독을 임명해서 폐허된 예루살렘을 재건케 한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이 어떠하든지 40여년동안 그토록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을 유다는 듣지 않았는데 이방인 느부사라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았더라도 작금의 현실을 하나님의 언약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곳에 재난을 선포했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였으며, 이는 유다가 것과 범죄하고,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은 것 때문이며, 마침내 예언한 일들이 이제 이루어지고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조목조목 원인과 결과와 주체에 대해 분명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예언을 오래도록 들었던 유다가 했어야 했는데, 결국 그들은 이 음성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그랬고, 역사 이래로 가장 주님과 가까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이들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할 일이 있기에 바벨론의 호의를 거절하고, 유다 백성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예레미야의 모습에서 충성된 자의 모습, 말씀을 맡은 자의 모습, 예언자의 길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동족을 향한 사랑과 소명을 다하는 충성이 자신의 이익을 향한 욕구보다 우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와 여호와의 언약적 관점을 제대로 짚어낸 이방인 느부사라단의 모습앞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낯설어 지고 부끄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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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2(cf. 왕하 25:23-24)절

바벨론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7절)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떠나 미스바에 자리를 잡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 유다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씁니다. [사무엘 전승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삼상 7:5이하; 10:17; → 삿 20-21장)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 안에 있습니다.] 아마도 남쪽의 유다 산지로 피신하였던 잔존 저항세력도 그다랴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지도자들인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 등이 그다랴에게로 돌아옵니다(8절). 그다랴는 이들에게 (예레미야의 선포와 동일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며 그의 재건 사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합니다(9절). 그는 이들에게 역할 분담을 제안하며, 자신은 미스바에서 갈대아인들을 상대할 것이니 각자 마음에 드는 성읍으로 가서 정착하여 살도록 권면합니다(10절). 바벨론 점령군이 그다랴에게 유다의 통치를 맡겼다는 소식을 듣고 요단 동편 모압과 암몬과 에돔 땅으로 피난하였던 유다 사람들(11절)이 돌아와 성읍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12절).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12b절)는 벌써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그다랴의 통치 아래 전후의 혼란과 절망감이 신속하게 극복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후에(41:1-3) 그다랴를 암살하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도 그다랴의 맹세에 참여합니다(9절). 이는 이스마엘이 후에 이 신뢰를 배반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다랴의 아버지 아히감은 사반의 아들로 26:24에서 여호야김의 위험으로부터 예레미야의 목숨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왕하 22:14에 의하면 아히감은 예언자 훌다에게 야훼의 신탁을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파견한 사절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사반의 또 다른 아들 엘라사는 시드기야 왕의 사신으로 바벨론에 갈 때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전해 줍니다(29:3). 사반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참여한 자였습니다(왕하 22:3이하). 이러한 단편적인 흔적으로부터 예루살렘 왕궁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반 집안이 예레미야의 신탁에 동조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사반 집안의 호의적 태도와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다랴의 정치적 노선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느부갓네살에 반기를 든 시드기야의 정책에 반대하는 예루살렘 궁전의 친바벨론 진영에 속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물론 바벨론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시드기야의 반역이 유다에 파멸적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 출발점은 달랐겠지만, 예루살렘과 유다의 바벨론에의 예속을 하나님의 심판 의지로 선포한 예레미야는 그의 친바벨론적 정치노선에 일치합니다.[역사적으로 독일 제후들의 루터 보호가 이와 유사한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의 존영과 회복을 원한다면, 지금 여기서 묵묵히 삶의 무게를 감당하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실패한 백성에게 ‘성급한 영광의 길’보다 ‘느린 회복의 길’로 오라고 부르십니다.”_매일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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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6(이스마엘을 신뢰하는 그다랴)

돌아온 유다 저항군의 모든 지휘관은 이스마엘이 암몬 왕 바알리스의 사주를 받아 그다랴를 암살할 생각으로 돌아왔다고 알려주지만 그다랴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14절). 요하난이 은밀하게 그다랴를 찾아가서 유다를 위해 자신이 이스마엘을 제거하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하지만(15절), 그다랴는 요하난을 의심하고 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16절). 암몬 왕 바알리스가 그다랴를 암살하려 했던 이유가 언급되지 않았기에, 그가 어느 정도, 어떤 이유에서 그다랴의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단지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갈대아인들은 애굽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유다 지역의 조속한 안정이 바벨론의 국가 이익에 유익하다고 보고 믿을만한 사람을 총독으로 임명했던 것 같습니다. 암몬 왕은 유다 지역의 안정이 자신의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다랴는 바벨론 왕에 의해 임명되었기에 암몬 왕의 의도는 그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습니다. 암몬 왕이 그다랴 암살의 배후인물이었다면, 바벨론의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다윗 가문에 속한 이스마엘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다랴는 어떤 생각에서 이스마엘의 음모를 보고하는 지휘관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을까? 이에 답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없기에 일반적인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그의 선한 성품이나 또는 상처받은 공동체의 화합과 안정을 해치지 않으려는 염려에서(cf. 40:9) 이스마엘의 암살음모를 무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는 그가 개인적으로 이스마엘을 (우호적으로) 알고 있어서(41:1b) 주위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만 보자면 요하난의 제안을 거절한 그다랴의 [잘못된] 판단은 이미 중상을 입은 유다를 절망적 상황에 빠뜨립니다.

선한 성품과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염려와 우호적인 자세로 자신의 명예와 신망을 잃지 않을 수는 있지만 때로 그것이 공동체 전체를 위기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빠른 판단과 지혜로운 처신이 필요할 때가 있고, 때로 개인의 명예와 이익이 침해 되는 것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지도자에게는 필요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명예는 지킬 수 있다고는 하나 결국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면 이는 지도자로서 무책임한 처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는 군주의 처신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지도자가 되어야 할 이들은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이에 적합하게 처신할 용기와 능력과 지혜가 없다면 마땅히 자신의 분수를 알고 거취를 결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깨닫기도 힘들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주위의 추앙에 권력에 눈이 멀어져 버리는 경우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도자의 길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일이고, 그 소임이 막중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세상은 둘째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도 주어진 권위와 권력을 어떻게 세우고 지키고 유지하고 또한 내려 놓을 수 있을지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주님의 통치를 민감하게 살펴가야 하겠습니다. 눈멀고 귀멀어 영적 감각이 무디어져서 멸망으로 치닫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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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영광과 회복의 주 하나님 아버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행한대로 보응하시며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오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이방인의 해석앞에서

정작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고 믿지 못하고 있는

영적 무감각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읽고

바르게 해석하고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민감함을 갖기 원합니다.

불의한 이들의 호의에 혹하지 않고

주의 백성들과 함께하는 고난을 외면치 않게 하옵소서.

성급한 영광의 길을 탐하지 말고

느린 회복의 길을 인내로 경주하게 하옵소서.

지체를 향한 사랑과 소명을 다하는 충성을

내 이익을 향한 욕구보다 우선하게 하옵소서.

시대를 분별하고 주변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사리분별을 제대로 판달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지혜도 주옵소서.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의 유익보다 더 중요시하는

이기적 자세를 버리게 하옵시며

지도자로 부름받은 이들이

그에 합당한 자세로 처신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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