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28-48
누가복음 19:28-48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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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타고 가실 나귀 새끼를 예비하시고, 무리의 환영 속에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평화의 왕을 영접하지 못하여 결국 멸망하실 것을 아시고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기능을 상실한 성전을 척결하시는 퍼포먼스를 행하시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지만 백성들로 인해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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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36절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니 주 뜻대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주인이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행하니 나귀의 주인은 이를 허락하고, 그 나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데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나귀의 주인도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자였고, 그 소유물은 주님의 구속 역사에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것, 심지어 사소한 것까지도 주의 뜻대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은 우리 삶에 대해 주님이 갖고 계신 절대적인 권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은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 재능, 물질, 자리…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주가 쓰시겠다 하실 때 기꺼이 내어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나귀 한 마리를 통해 구속의 큰 그림을 이루셨듯이, 우리의 작은 순종도 그분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삶,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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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40절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무리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뻐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책망하라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구약 스가랴서의 예언 성취입니다. 그는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분을 정치적 해방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환영합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왕이 아니지만, 그분은 참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찬양은 세상이 막아도 멈출 수 없는 생명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고백하고 있나요? 원하는 것만 채워주는 왕이 아니라, 나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참된 평화의 왕으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너무도 쉽게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버리고 팍스로마의 방식을 따릅니다. 그것이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우리의 탐욕을 부추겨 폭력에 쉽게 노출되게 합니다. 그런 주를 바라고 있다면 우리도 어느새 평화의 왕 예수님을 팍스로마의 황제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기에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침묵을 강요해도, 우리는 돌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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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44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평화의 왕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해 눈물 흘리시는 자비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오시자 성을 보며 우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 그리고 멸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가져오셨지만, 예루살렘은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평화를 가져오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스스로 파멸을 선택한 셈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심판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예루살렘처럼 완악해지지 않도록 매일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실 때, 회개하고 응답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주님의 눈물을 헛되게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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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48절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척결하시고 하나님의 거룩을 회복하시는 거룩한 심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의 본래 목적이 ‘기도하는 집’임을 선언하십니다.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시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이려 음모를 꾸밉니다. 다만 백성들이 그 말씀에 귀 기울이므로 즉각 행동에 옮기지 못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거룩한 공간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익과 탐욕이 성전을 더럽히고, 종교 권력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회복하려는 거룩한 개입입니다. ‘기도하는 집’은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열방의 누구도 제한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혈통을 통해 이방인을 제한하고, 빈부격차와 신분으로 성전을 제한하고 있기에 주님은 이러한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전통에 도전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보다 민심을 더 두려워합니다.
오늘 우리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교회, 공동체, 마음은 기도의 집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로 가득 찬 소굴입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모신다면, 그분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며 진정한 예배와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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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귀 한 마리를 준비하신 섬세함 속에,
하나님의 뜻을 향한 권위와 순종을 봅니다.
주님은 칭송받기 합당하신 분이시며,
그 누구보다도 자비로우시며,
거룩을 회복하시기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드리며,
돌들보다 먼저 찬양하며,
주님의 눈물을 기억하며 회개하며,
나의 성전됨을 날마다 돌아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