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다

쉴만한 물가 - 59호

20130503 - 산에 오르다


신발도 챙기고 옷도 챙기고, 필요하면 지팡이도 챙기고, 물도 한병 챙겨서 가볍게 출발한다. 처음에는 완만한 곳을 걸어가게 되고, 주위에 이것도 저것도 보이면서 상쾌하기만 하다. 풀내음, 꽃내음이 산들바람에 코끝을 스쳐 지나가면 한껏 숨을 들이키고 쉬엄쉬엄 걸어간다.


어디로 오를까? 절경이 있는 곳으로 갈까? 오르기 편한 곳을 택할까? 산을 오르는 여러 길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떤 길이든 일단 택한 길이면 이젠 정상을 향하여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돌짝, 가시넝쿨, 촉촉한 흙길, 간혹 나뭇잎이 소복이 쌓여 폭신한 길 모두 비록 신발을 신었지만 발바닥으로 그 감촉들이 느껴진다.


아직까진 산에 대한 설렘도 있지만 점점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하던 일, 산적한 일들, 그리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들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가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잊혀진 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얼마나 일찍 갔기에 벌써 내려올까? 무엇을 보고 왔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내 내가 가야 할 산을 생각하면 곧 잊혀진다. 때로 처음 가는 산이면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묻지만 내려오는 이들의 대답은 대부분 거의 다 왔다고 한다. 정상에 다녀온 이들에겐 오를 일이 쉬워 보이나 보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 거릴 즈음이면 차츰 생각이 없어진다. 한걸음 한걸음 떼기에 집중할 때쯤이면 숲에서 나는 나무와 흙의 냄새들과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그렇게 오른다. 연초록이 이렇게 많은 색감을 낼 수 있는지 5월의 산은 초록의 마술사다. 그런 아름다움이 힘겨움을 잠시 잊게도 한다.


숨이 턱에 차 오르고 몇 번이고 물을 들이키며, 온몸이 뜨거워져 땀으로 범벅이 될 즈음이면 어느새 저만치 정상이 보인다. 잠시 되돌아보면 어느새 걸어온 길이 까마득해지고 저 멀리 그토록 아등바등 거리던 세상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쉼도 잠시 또다시 오르던 길을 재촉하며 서둘러 올라간다.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쉬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만만치 않다는 생각도 들고, 마지막 고비를 오를 때면 그만할까 생각도 들기도 한다.


마침내 정상에 오르면, 오르면서 들었던 상념도, 고민들도 어느새 저 멀리 바람에 날아간다. 가만히 저만치 산아래 세상을 바라보니 마음이 뻥 뚫린다. 두 팔을 벌려 바람과 더불어 세상을 안아 본다. 성취감에도 뿌듯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준다. 이제 또 내려가야 하지만, 문득 저 멀리 더 높은 산들도 보이고 비슷한 산들도 끝없이 보인다. 내가 오른 산만 산이 아니라 세상에는 많은 산들이 있다는 사실과, 나는 그 가운데 한 산을 올랐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괜스레 겸손해진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탐욕도 성냄도 벗어놓고 말없이, 티 없이 살라 했나 보다.


삶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저마다 가는 길도, 방법도, 속도도, 마음도, 결과도 다르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일도 없다. 그러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듯이 그렇게 부단히 주어진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쉼 없이 오르기보다 잠시 되돌아보는 쉼표와 같은 시간들이 있을 때 교정과 용기와 정진에 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시간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여정 가운데 함께 하는 동행이 누구인지, 왜 오르는 것인지 그리고 그 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완주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더불어 그 앞에서 겸손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


오늘도 산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가운데 나와 우리가 있다. 부디 산이 주는 가르침에 잠시 귀 기울여 산처럼 넉넉해 짐을 닮아 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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