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빚짐이다

쉴만한 물가 - 190호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20160605 - 삶은 빚짐이다.


오래전 동양화 중에서 맹호도를 그리는 이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떨어져서 볼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맹호의 털 하나하나 가느다란 붓 끝으로 한 획씩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한 폭의 그림에 꽉 채워 앉아 있는 몸 전체에 있는 털이 다 그렇게 채 몇 밀리미터 되지 않는 선과 점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도 놀랐지만, 그것이 또 아무렇게나 찍혀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서 볼 때 호랑이의 등으로 윤기가 흐르는 것이 표현되어 있어 더 놀랐다. 수 일을 그렇게 그려가던 그림이 완성되는 날이 마침내 왔다. 매일 몸부림치며 그렸던 날들을 옆에서 보고 기억하기에 그 그림의 가치는 너무도 귀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런 정성스러운 작업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했던 것이다.


삶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수 없이 많은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서 우리 삶의 그림들을 그려가는 것이다. 흔들리듯 몸부림치며 점 하나하나를 바로 찍어가야 하는 것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도 그렇게 정성껏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간혹 그런 오늘의 일상을 벗어나고픈 욕망에 흔들리는 이들이 있다. 마치 행복이 내일 혹은 더 건너편에 있다고 생각하고 오늘을 대충 살아가거나 누리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려 한다. 그런 삶에 있어서 행복의 지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을 소중하게 살아가고 누리는 이들의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 할 수 있겠다.


삶은 빚짐이다. 일찍이 철학자들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표현했다. 한자의 사람 인(人) 자도 두 사람이 함께 기대어 서 있을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 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오늘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방향과 맛이 달라진다. 나도 모르게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받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오늘의 나 됨은 많은 이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영향의 산물이다. 그것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구분되기란 쉽지 않다. 짧게 보면 좋은 것도 길게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짧게 보면 나쁜 것도 길게 보면 결국 그것이 어떤 긍정적인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 나라는 사람이 있게 된 것이기에 우리는 모두로부터 삶을 빚지게 된 것이다.


잠시만 삶을 회고해도 장단에 관계없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들을 만났음을 알게 된다. 사람도 있지만 사건도 있고, 사물도 있다. 그런 모든 것들의 공급과 희생과 영향 하에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살 같은 모든 것을 주셨던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릴 적 동무들과 글에 눈을 뜨면서 배우게 된 스승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동네의 어르신들과 이후에 만난 많은 친구들과 큰 배움의 터에서 만난 이들과 책을 통해 만난 이들까지. 거기다가 이젠 사회에서 만나는 관계들과 온라인에서 만나는 정보와 양식들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는 거대한 우주로부터 큰 빚을 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빚진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고마운 법이다. 여기 있는 것이 고맙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고맙다. 그래서 더욱 겸손하게 된다. 나의 인생이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 덕분에 살고 있기에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남용하지도 않고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존중과 감사와 소중함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날들을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어찌 파괴와 기만과 탐욕으로 점철할 수 있겠는가?


요 며칠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옆 동네 곡성과 멀리 서울까지 아직 다 피지도 못한 젊은이랑 한 가장의 안타까운 부음(訃音)들을 들었다. 그 이들의 유족 특히 어머니의 마음은 뭐라 위로할 수 있을까. 저주라도 대신 받으마 할 정도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수많은 이들의 애도의 연대를 보았다. 아직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이들의 사랑의 연대 때문이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빚진 자임을 아는 인생이고, 그래서 이미 받은 것을 다시 준 이에게 돌릴 수 없기에 그것을 흘러 보내 다른 누군가에게 대신 빚을 갚아 주는 삶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점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풍경을 그나마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날들을 주기 위해 우리 앞에 큰 희생으로 생을 점철한 이들을 고마워하며 모든 것들에 빚진 자로서 감사하며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 빚을 갚는 마음으로 이 한 날들을 살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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