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42-59 존재의 뿌리, 거짓의 안개를 걷어내는 사랑의 섬광
요한복음 8:42-59 존재의 뿌리, 거짓의 안개를 걷어내는 사랑의 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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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혈통이나 문자의 고집을 내려놓고, 우리 존재의 시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하며 '영원'의 질서 속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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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대화가 마침내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내면에 도사린 살의와 불신을 향해 아픈 질문을 던지십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요 8:43) 그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면서도, 정작 아브라함이 가졌던 ‘열린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잃어버렸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그들의 삶은 욕망과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닮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익숙한 것의 함정’에 빠집니다. 내가 믿는 방식, 내가 배운 교리, 내가 속한 전통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을 때, 우리는 우리 곁을 지나는 ‘살아있는 진리’를 배척하게 됩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이 딱딱한 종교적 외벽에 부딪혀 상처 입은 이들입니다. 주님은 그 견고한 자기중심성을 향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요 8:47)라고 말씀하십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꺾고 그분의 뜻에 나를 일치시키는 순명(順命)의 태도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향해 ‘귀신 들렸다’고 조롱하는 이들 앞에서 단호하게 당신의 선제성(先在性)을 선포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이 말씀은 시간의 연대기를 뛰어넘는 영원의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을 넘어,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계셨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이 ‘영원’의 빛을 오늘이라는 유한한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생물학적 불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사귐 속에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삶이 허무하고 존재가 가볍게 느껴질 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브라함의 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아니 창세 전부터 예비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데 전념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드러내려는 허영의 돌을 내려놓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대화의 끝에 사람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 했습니다. 진리가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몸을 숨겨 성전에서 나가십니다. 빛은 거부하는 자에게 강요되지 않으나, 갈망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오늘 하루, 내 안의 거짓과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나를 존재하게 하신 그 근원적인 사랑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그 영원의 빛 속에 머물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참된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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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42-59 귀를 막고 돌을 든 세상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애달픈 사랑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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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고집과 편견의 귀를 닫고 진리이신 주님께 돌을 던지려는 폭력성을 내려놓고, '말씀이 나를 읽어내도록' 내 영혼의 자리를 내어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빛에 접속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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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기어코 연둣빛 생명이 솟아오르는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삶의 고단한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신앙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언제나 잣대를 들고 타인을 평가하며, 내 생각과 다르면 가차 없이 배제하려는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8장 후반부의 성전 뜰 역시, 진리를 향해 살기등등한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단은 서늘하리만치 단호합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3-44).
그들은 왜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내면이 이미 다른 것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우리의 마음을 어떤 집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의 방에 들어가 보면, 벽마다 시커먼 ‘비닐봉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그 안에는 남을 향한 원망, 내가 무조건 옳다는 교만, 이기적인 욕망 같은 것들이 담겨 퀴퀴한 냄새를 풍깁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의 방 역시 ‘선민의식’과 ‘종교적 기득권’이라는 검은 봉지들로 가득 차 있어서,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맑고 신선한 진리의 바람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완악하게 귀를 막고 적대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또다시 입을 여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한동일 변호사는 라틴어로 “아멘, 아멘 디코 보비스(Amen, amen dico vobis)”로 번역되는 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예수님의 화법에 주목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듣지 않았으면, 이렇게 두 번이나 거듭해서 ‘진실로’를 외치셔야 했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조리함과 죄악을 들추어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닫힌 귀를 열고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애가 타는 심정으로 이 말씀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을 정죄하려는 차가운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려내려는 가장 뜨겁고 애달픈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이 끈질긴 사랑의 음성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깊은 ‘묵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내가 성경을 읽고 분석하여 내 삶의 지침이 될 만한 교훈을 찾아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묵상은 그 반대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시인 이성복은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 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 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를 받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언어도 그러한데, 태초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언어는 어떠하겠습니까? 묵상이란, 내가 말씀을 재단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위대하신 생명의 말씀이 내 영혼의 구석구석을 읽어내시도록 나를 무방비 상태로 내어맡기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내 마음의 방에 매달린 시커먼 비닐봉지들을 치우고, “주님, 저를 읽어주십시오”라고 엎드릴 때 비로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내 말씀이 자신들을 읽어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요 8:58)라며 당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자, 그들은 마침내 땅에서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합니다(요 8:59). 내 상식과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 진리 앞에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스스로를 성찰하기보다 진리를 죽이려는 폭력으로 분출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지쳐 회의가 밀려올 때가 있습니까? 혹은 내 삶을 불편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말씀 앞에서, 유대인들처럼 슬그머니 합리화와 변명의 돌멩이를 집어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믿음이 이토록 초라한가 싶어 자책하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돌을 든 자들에게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복수하지 않으시고, 그저 무리를 피해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요 8:59). 그리고 그 발걸음은 훗날 그들의 죗값, 아니 돌을 든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돌을 내려놓을 만큼 선하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끝내 우매하여 돌을 집어 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주신, 그 압도적이고 맹렬한 십자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제 진리를 향해, 혹은 내 맘에 들지 않는 이웃을 향해 집어 들었던 날 선 돌멩이를 살며시 내려놓으십시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도 벗어버리십시오. 영원 전부터 계신 주님이 오늘 우리의 비루한 일상 속에 찾아오셔서 “내가 진실로 너희를 사랑한다”고 속삭이십니다. 이번 한 주간, 내 마음의 어두운 방을 비우고 생명의 말씀이 나를 환히 읽어내시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평안하고도 경이로운 순례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굳은 마음은 한겨울 유리창에 두껍게 낀 ‘성에’와 같습니다. 성에를 없애겠다고 날카로운 칼이나 돌멩이로 벅벅 긁어대면, 창문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바깥 풍경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침이 밝아오고 부드럽고 따스한 봄볕이 유리창 위에 가만히 내려앉으면, 그 단단하던 성에는 어느새 소리 없이 녹아내려 투명한 창을 통해 맑고 푸른 하늘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내 힘으로 나를 고치려는 거친 노력을 멈추고, 은혜의 말씀이라는 따스한 볕이 나를 온전히 비추도록 허락할 때, 우리 영혼의 굳은 결빙도 녹아내려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하늘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