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12
요한복음 9:1-12 인과율의 감옥을 넘어, 빛으로 빚어지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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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고난의 원인을 따져 묻는 '인과의 문법'에서 벗어나, 그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목적의 문법'으로 삶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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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던 제자들의 시선이 한 시각장애인에게 머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그의 기구한 운명 앞에서 제자들은 연민보다 먼저 '이유'를 찾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지배해 온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불행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돌릴 때 우리는 잠시 안도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그 질문 자체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릅니다. 고통당하는 이에게 '죄'를 묻는 것은 그를 존재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잔인한 폭력입니다.
예수는 이 서슬 퍼런 인과의 사슬을 단칼에 끊어내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주님은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선을 미래의 소망으로 돌려놓으십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왜(Why)'를 '무엇을 위하여(For what)'로 바꾸라고 초대하십니다. 고난은 정죄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이 닿아야 할 거룩한 빈자리입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것은 마치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던 하나님의 손길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명하십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실로암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보이지 않는 길을 믿음의 지팡이 하나로 의지하며 걷는 순명(順命)의 여정이었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상황이 다 이해되어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나를 보내신 분의 음성을 나침반 삼아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가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구걸하던 맹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체현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삶의 어둠이 깊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누군가를 혹은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결핍을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결핍을 당신의 영광이 머물 처소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겪는 상처와 아픔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위한 '재료'입니다. 주님의 손에 우리 삶의 진흙탕 같은 현실을 맡겨 드릴 때, 그분은 그것으로 우리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신비로운 약을 만드실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그 곁에 머물며 함께 실로암으로 걸어가는 환대의 사람이 됩시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그 빛을 받아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인과의 감옥을 나와 은총의 들판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남루한 일상은 비로소 하나님의 경탄이 머무는 축제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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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1-12 정죄의 시선을 거두고, 상처 위에 진흙을 개어 바르시는 다정한 손길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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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고통의 원인을 타인의 허물에서 찾으려는 세상의 차가운 인과율을 멈추고, 우리의 가장 남루한 현실에 다가와 진흙을 이겨 바르시며 어둠을 빛으로 빚어내시는 주님의 맹렬한 은혜에 기대어 참된 눈을 뜨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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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아래로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수맥이 흐르고, 기어코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려 꿈틀거리는 3월의 문턱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짙은 모호함과 신앙의 회의 속에서 여전히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참으로 얄팍합니다. 어떤 불행이나 고통과 마주할 때, 세상은 언제나 잣대를 들이대며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져 묻곤 합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해야만 비로소 안심하는 얄팍한 자기방어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9장의 제자들 역시 그 차가운 시선에 갇혀 있었습니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과 제자들 앞에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를 본 제자들이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제자들이 던진 이 질문은 몹시도 차갑고 뾰족한 언어입니다. 그들의 눈에 맹인은 공감하고 아파해야 할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죄의 인과관계를 따지기 위한 신학적 ‘토론의 소재’에 불과했습니다. 제자들은 ‘고난은 곧 죄의 결과’라는 굳어진 편견의 틀 속에 하나님을 가두었기에, 눈앞에 있는 이웃의 찢긴 가슴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앙상한 교리를 단숨에 허물어뜨립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주님은 과거의 잘못을 캐묻는 ‘원인의 언어’를,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목적의 언어’로 바꾸어 내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흠결투성이인지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 비루한 상처를 재료 삼아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을 행하실지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참으로 낯선 행동을 하십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요 9:6). 말씀 한마디로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 왜 굳이 그 번거롭고 지저분한 방식을 택하셨을까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첫 창조의 사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주님은 지금 멀찍이 떨어져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친히 허리를 굽혀 냄새나는 흙먼지와 당신의 체액을 섞어, 망가진 인간의 눈에 바르시며 우리를 ‘재창조(Re-creation)’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압도적인 은총의 손길을 우리 삶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정성국 교수는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에서 묵상을 가리켜 “하나님을 향한 우리 몸의 약속”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묵상은 그저 머리로 지식을 채우는 사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내 눈에 덧발라진 세상의 탐욕과 편견을 씻어내기 위해, 말씀이라는 물가로 나의 몸을 이끌고 가 순종하는 치열한 약속의 이행입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바르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고 하셨을 때, 맹인이 자신의 몸을 움직여 더듬거리며 실로암으로 나아갔던 그 걸음 전체가 살아있는 묵상이었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성경을 강독하며 맹인 바르티매오의 부르짖음을 자신의 언어로 고백합니다. “랍보니, 우트 비데암(Rabboni, ut videam.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다시 보게 해주십시오”. 눈을 뜨고 있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영적 맹인이 되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스스로 어둠 속에 있음을 자각한 맹인은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참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삶은 왜 늘 이토록 고단할까?”, “나의 연약함과 실패는 다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회의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더 열심을 내어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에 짓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강박의 짐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어둠 속에 앉아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여러분의 죄를 묻기 위해 오시지 않습니다. 오직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흙먼지 날리는 여러분의 고단한 일상 곁에 친히 무릎을 꿇고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못난 상처 위에 다정하게 진흙을 발라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보냄 받은 곳(실로암)을 향해 묵묵히 씻으러 가는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의 물에 우리의 아픔을 씻어낼 때,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맑고 환한 생명의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정죄하는 세상의 소음에는 귀를 닫고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의 온기에 영혼을 맡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상처 입은 인생은 성당의 창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와 같습니다. 깨어지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은 그 자체로는 쓸모없고 위험해 보입니다. 때로 우리는 그 깨진 조각들을 바라보며 누구의 잘못이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술가이신 주님은 그 상처 난 조각들을 모아 은총의 납틀로 이어 붙이십니다. 캄캄한 밤에는 여전히 볼품없어 보이지만, 아침이 밝아와 참 빛이신 주님의 사랑이 그 조각들을 투과할 때, 우리의 찢긴 삶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하고 눈부신 ‘하나님의 작품’으로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